사마천司馬遷이 편지에 적은 심경고백
중국 최고의 역사가로 칭송받는『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기원전 145?-86?)은 한나라 무제의 태사령이 되었을 때『사기』를 집필하여 기원전 91년에 완성했습니다. 그는 기원전 91년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사형판결을 받고 집행을 기다리던 한나라 무제 때의 장군 임안任安에게에게 보낸 편지報任安書에서 다음과 같은 절절한 통곡의 심정을 전했습니다. 이는 임안의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습니다. “일개 사관史官에 지나지 않는 사마천이 편지를 올립니다”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사마천은 서두에서 항상 혼자서 우울하게 지내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의 처지를 탄식했습니다. 사나이는 자신을 알아주는 자를 위해 죽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면서 부끄럽게도 자신은 반쪽이 되고 말아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음을 탄식했습니다.
“사람의 지혜知慧란 수양修養의 깊이에 의해 알 수 있고, 인仁은 동정심同情心의 유무有無에 의해 알 수 있으며, 의義는 주고받음의 정당성正當性에 의해 나타납니다. 또한 용기란 염치를 얼마나 아는가에 달려 있으며, 행行이란 이름을 어떻게 떨치느냐에 의해 평가된다고 합니다. 이 다섯 가지의 덕德을 갖춰야만 군자君子로 처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저는 천하의 산실된 구문舊聞을 수집하여 행해진 일을 대략 상고하고 그 처음과 끝을 정리하여 성패흥망의 원리를 살펴 모두 130편을 저술했습니다. … 그러나 초고를 다 쓰기도 전에 이런 화를 당했는데, 나의 작업이 완성되지 못할 것을 안타까이 여긴 까닭에 극형을 당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진실로 이 책을 저술하여 명산名山에 보관했다가 나의 뜻을 알아줄 사람에게 전하여 촌락과 도시에 유통되게 한다면 전에 받은 치욕에 대한 질책을 보상할 수 있을 것이니 비록 만 번 주륙을 당한다 해도 어찌 후회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지혜로운 이에겐 말할 수 있지만 속인에겐 말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사마천은 “가장 추한 행동은 조상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며, 치욕으로서 으뜸가는 것은 궁형을 받는 일”이라면서 “궁형 받은 자를 인간으로 취급조차 하지 않는 관습은 까마득한 옛날부터”라고 자신의 신세를 다시금 한탄하면서, “지금 조정에 인재가 없다 하여도 나 같은 자가 어찌 천하의 인재를 추천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반문했습니다. 그는 생식기를 없애는 궁형宮刑을 당하면서도 살아남은 이유는『사기』를 완성하기 위해서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건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지낸 동료 이릉李陵(기원전 ?-74)을 옹호했기 때문입니다. 젊어서부터 기마와 궁사에 능했던 이릉은 기원전 99년 서역 대완의 이사성을 공략하여 한혈마를 얻어, 이사장군이라고 불린 이광리李廣利가 흉노를 쳤을 때 보병 5천을 인솔하여 출정, 흉노의 배후를 기습하여 이광리 장군을 도왔습니다. 그러나 귀로에 무기와 식량이 떨어지고 8만의 흉노에게 포위되어 항복했습니다. 무제武帝가 그 사실을 듣고 크게 노하여 이릉의 어머니와 처자를 죽이려 했습니다. 이때 사마천이 이릉을 변호한 탓으로 무제의 분노를 사서 궁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이릉은 흉노에 항복한 후 선우單于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고, 우교왕右校王에 봉해져 선우의 군사, 정치의 고문으로서 활약하다 몽골고원에서 병사했습니다. 이릉의 분전, 항복의 비극은 중국인 사이에서 시와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릉은 어버이에게 효孝를, 친구에게는 신의信義를 다했고, 금전관계가 깨끗했으며, 몸과 마음을 바쳐 나라에 충성忠誠하려는 굳은 의지가 있었으므로 사마천은 그를 큰 선비와 같은 기품을 가진 인물로 확신했습니다.
사마천은 왕에게 “이릉은 항상 부하들과 고락苦樂을 함께 했으며, 불행히도 포로가 된 것은 후일 조국에 다시 봉사하겠다는 충정에서였을 것입니다. 비록 일시적이라 해도 흉노의 대군을 격파한 공적은 천하에 알려 표창할 만한 것”이라고 고했다가 이릉 장군을 두둔하여 총사령관이던 이광리 장관을 깎아내린다는 오해를 받고 궁형에 처해졌던 것입니다.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마천은 “저는 어려서부터 이렇다 할 재주도 없었고, 성인이 되어서도 고향 사람들의 찬사讚辭 한 마디 들어보지 못한 채 아버님 덕분에 폐하의 부르심을 받아 궁중에 드나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과거를 언급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저는 봉후封侯의 영예나 특별한 포상을 받은 적이 없는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사太史란 직업은 무당이나 점쟁이에 가깝고, 이른바 폐하의 우롱을 받는 악공樂工이나 배우 등과 같은 부류에 속할 뿐이며 세상 사람들이 모두 경멸하는 대상입니다.
이러한 제가 법에 따라 사형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한낱 아홉 마리 소 중에서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과 같을 뿐이니, 저와 같은 존재는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微物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리고 세상 사람들 또한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절개를 위해 죽는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오직 나쁜 말 하다가 큰 죄를 지어 어리석게 죽었다고 여길 것입니다. ...
깊은 산에서는 백수의 왕인 호랑이도 우리 속에 갇히게 되면 꼬리를 흔들며 먹이를 구걸求乞하게 됩니다. 협박당하고 고통 받은 결과가 그러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손발이 묶이고 벌거벗겨져 채찍을 맞고 감옥에 처박히면, 옥리獄吏만 보아도 머리를 땅에 박고 간수나 잡역부에게조차 겁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때 오히려 자기가 기개氣槪를 세우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실상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
죽음을 두려워하고 부모, 처자를 걱정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저는 불행히도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형제조차 없이 외롭게 살아왔습니다. 그런 제가 새삼스럽게 부모와 처자 때문에 살고자 했다고는 장군께서도 생각하지 않을 줄 압니다. ...
천한 노예와 하녀조차도 자결할 수 있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하려 했다면 언제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과 굴욕을 참아내며 구차하게 삶을 이어가는 까닭은,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숙원宿願이 있어 비루하게 세상에서 사라질 경우 후세에 문장文章을 전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
인간이란 가슴에 맺힌 한을 토로할 수 없는 경우에, 옛날 일들을 엮고 미래에 희망을 갖기 위해 명저名著를 남기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
저도 제 분수를 모르고 서투른 문장에 스스로를 맡기고자 하여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옛 기록들을 모아 그 사실 여부를 가려내고 체계를 세워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이치를 정리하여 황제皇帝의 상고시대上古時代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표表」 10편, 「본기本紀」 12편, 「서書」 8편, 「세가世家」 30편, 「열전列傳」 70편, 총 130편으로 계획했던 것입니다.”
사마천은 자신이 “말을 잘 못하는 바람에 이런 화를 당해 고향에서 비웃음거리가 되고, 돌아가신 아버님을 욕되게 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부모님 산소 앞에 설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후궁에서 봉사하는 환관의 처지로 세속과 영합하면서 그날그날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