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를 읽고 장자에게 배운다』 중에서

 

 

 

 

쓸모 있어야 할 때와 쓸모 없어야 할 때

 

 

『장자』에 나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 가지 더 살펴보자. 남영주南榮趎라는 나이가 아주 많은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스승 경상초庚桑楚를 뵈러 갔다. 스승이 말했다.
“이렇게 고령에도 배움의 길을 계속 가고자 하는 뜻은 가상하나, 내게는 더 이상 너에게 가르쳐 줄 것이 없구나. 소개장을 한 장 써줄 테니 노자 선생님을 직접 찾아가 배움을 청해라.”
남영주는 멜대에 필요한 물건을 메고서 7일 밤낮을 걸어가 노자에게 배움을 청했다. 그는 노자에게 세 가지 질문을 했다.
첫 번째 질문은 총명함에 관한 것이었다. 너무 총명하면 뭐든지 계산적으로 따지게 되므로 다른 사람들의 이익에 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총명하지 않다면 남들이 멍청하다 욕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둘 중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할까?
두 번째 질문은 사랑하는 마음에 관한 것이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남들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도우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삶은 많이 피곤해진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
세 번째 질문은 의로움에 관한 것이다. 의로운 사람은 해야 할 일을 발견했을 때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간다. 그렇게 하면 분명히 몸은 고단해진다. 하지만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사람은 때로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서 고민한다. 총명하고 의리도
있는 쓸모 있는 인간과 총명하지 못하고 의리마저 없는 쓸모 없는 인간,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제대로 처신하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장자』에서는 이와 유사한 문제를 여러 차례 다룬다. 어떤 때는 쓸모 있는 쪽이 괜찮지만 때로는 한 발짝 물러서 쓸모 없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개인적인 바람은 무시한 채 그저 사회에 보탬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려고만 하는 사람이 있다. 『장자』에서는 이런 이의 삶을 뭐라고 했을까? 남의 요구에만 신경 쓰고 정작 자신의 바람은 무시한다면 결국 당신의 삶은 껍데기만 남게 된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장자의 사상과 서양의 실존주의를 비교하기도 한다. 실존주의에서는 개인의 존재는 반드시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말했다. 이 말은 곧 존재는 자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선택했다는 의미로, 우선 자신이 되기로 결심해야만 앞으로 그 본질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대학을 나와 엔지니어가 되기로 결심했다면 이 선택 자체가 존재다. 동시에 존재는 선택의 가능성이다. 정말 엔지니어가 된다면 엔지니어의 본질을 갖추게 되는 셈이다. 즉 본질보다 존재가 앞서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자신의 삶을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대학입시에 응시하는 많은 수험생들이 대개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의 의견을 따른다. 자신에 대해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좇는 목표는 사회 공통의 목표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보았을 때 그 목표가 적합한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사람마다 기호나 취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점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에 대해 알아보았다. 때때로 어느 한 사람이 한 일에 대해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 쓸모 여부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많은 예술가들의 삶에서 젊은 시절 고생하다가 늙어서는 작품을 인정받아 서서히 상품화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최근에 우연히 자식들이 예술을 하는 친구 몇 명을 만났다. 그들
은 예술이 돈으로 그 가치를 바꿀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성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술가에게 자신의 작품은 분명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유명한 예술가 중 반 고흐가 있다. 그는 생전에 단 한 번도 이런 문제로 고민할 기회도 없이 평생 자신의 작품을 단 한 점밖에 팔지 못했다. 그리고 서른일곱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삶은 분명 불행했다. 그렇다면 그는 화가로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면 될까? 오늘날 그의 작품이 특별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니 그것으로 족한 것일까?
반 고흐는 당시 쓸모 있음과 없음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세속의 눈으로 보면 그는 그다지 쓸모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생전에 동생이 남에게 부탁해서 겨우 작품 한 점을 팔았을 뿐이지 않은가. 하지만 반 고흐는 세상을 떠나고 2, 3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나고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에 관한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기자가 반 고흐가 생전에 살던 집에 찾아 갔다. 마침 그가 살았던 당시에 어린 소녀였던 여성이 중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옆집에 살고 있었다. 기자가 물었다.
“어렸을 때 이웃에 살던 화가 한 분을 기억하세요?”
그러자 여성이 대답했다.
“아주 이상한 사람이었어요. 보통사람들과는 많이 달랐지요. 날씨가 맑건 흐리건 아침 일찍부터 화구를 메고 밖으로 그림을 그리러 갔어요.”
반 고흐를 기억한다는 사실에 신이 난 기자가 이번에는 그 여성에게 그를 묘사해 달라고 부탁했다. 한참을 생각하더니 그 여성은 이렇게 대답했다.
“정신병자 같았어요.”
이것이 반 고흐가 다른 사람들에게 남긴 인상이다. 그는 쓸모 있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은 사람인가? 지금은 반 고흐가 그린 그림이라고 하면 그것이 소묘일지라도 가격이 적게는 수백만 달러에서 많게는 수천만 달러에 달한다. 그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물론 지금 그의 가치를 돈으로 따질 수는 없다. 그가 인정받는 이유는 그의 그림에 생명에 대한 갈망이 있고 많은 이들이 심미적인 감동을 받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예술의 가치다. 현실적인 이익이나 조건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사실 유용성과 무용성을 단일한 기준으로 나눈다는 건 불가능하다. 사람은 자신의 삶에 책임을 져야 한다. 장자가 평생을 가난하게 산 것도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신의 본성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위해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의 삶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이 사람은 쓸모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쓸모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혼란한 시기에 소극적인 태도로 세상의 재난을 피하느니 어떻게 하면 좀 더 자유롭게 살 수 있을지 고민했다. 사람들은 유가의 가르침으로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유가를 통해 참됨을 익히고 어떤 이해관계에도 연연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가를 통해서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도가 어디에도 다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좀 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도가 학설은 역사상 각 시기에 각기 다른 영향을 주며 발전해 왔다. 서한西漢 초년, 한漢 문제文帝, 한 경제景帝 때에는 도가사상이 치국사상의 근본이었다. 이때는 이른바 ‘문경지치文景之治’의 시기로 진秦나라의 혹정에 지친 백성을 달래고 안정을 도모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이후 한 무제가 모든 학문을 배척하고 오직 유가만 존중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이 과정에서 도가는 비주류 사상으로 밀려났다. 비록 정부에게는 외면당했지만 도가는 중국 고대사상의 발전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과거 노장사상의 이해와 관련해 큰 이견이 나타났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 노장사상을 접했던 것일까? 노장사상에 대한 오해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신新도가 시대라고 불리는 위진魏晉 시기에는 노장사상을 상당 부분 오해하고 있었다. 당시 『노자』, 『장자』, 『역경』은 소위 말하는 삼현三玄으로 학문하는 선비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였다. 또한 일상의 평범한 대화에서도 이와 관련된 문제를 논했다. 그들은 노장사상을 매우 현묘한 사상으로 여겼고 현실 세상과는 동떨어진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시대 전반에 걸쳐 이러한 그릇된 인식이 팽배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그때가 유명한 학자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노장사상에서 정신적인 해탈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정신적인 해탈은 장자가 주장한 궁극의 목표는 아니었다. 장자는 인간세상을 깊이 이해하고 동정했다. 그래서 그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닌 사고방식을 바꿔서 한 단계 더 위로 올라가는 것을 최고의 경지로 보았다.

 


노자와 장자가 주장한 유용과 무용에 관한 사상의 핵심은 우리에게 현실을 도피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효과적으로 전환하여 한 단계 위로 올라설 수 있는 방법을 배워 자유롭게 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복잡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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