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국으로 들어온 예수, 중국 밖으로 나간 공자

가톨릭이 처음 중국에 들어온 시기는 당나라 때였다. 당시 중국에 유입된 가톨릭은 네스토리우스파였다. 그러나 당나라의 15대 황제 무종은 도를 믿어 불교 탄압 정책을 폈으며, 그 여파가 네스토리우스파 즉 경교에까지 미쳐 사멸하고 말았다. 원나라 때도 가톨릭을 전파하기 위해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가리켜 애카임4 으로 불렀다. 이는 가톨릭과 네스토리우스파를 통칭해 부른 말로 원나라 후기에 소멸되었다. 17세기 말에 가톨릭이 다시 중국에 들어왔다. 그즈음 가톨릭 선교사들이 서양에 공자를 소개했으므로 공자와 예수의 사상이 교류할 수 있었다. 중국에 가톨릭이 전파됨으로써 얻은 결과였다. 예수는 공자보다 약 5백 세 어리지만 그의 영향은 공자보다 훨씬 컸다.
공자를 서양에 처음 소개한 사람은 마테오 리치였다. 중국에서 27년 거주한 그는 『논어』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으로 알려졌다. 벨기에 선교사 필립 쿠플레는 1687년 파리에서 『대학』, 『중용』, 『논어』의 라틴어 역에다 ‘공자전’을 덧붙여 『중국의 철인 공자』란 책을 발간했는데, 이 책은 최초의 완전한 『논어』 번역이었다. 18세기에 벨기에 신부 노엘이 라틴어로 번역한 『중국의 고전 육경六經』은 『중국의 철인 공자』 등과 함께 볼테르, 루소, 몽테스키외 등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마테오 리치는 공자의 존칭 공부자孔夫子를 라틴어 ‘Confucius’로 번역했고, 이때 번역한 용어가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공자가 서방 국가로 간 지도 벌써 3백 년이 흘렀다. 공자의 영향은 20세기 말 미국에 보스턴 유학파와 하와이 유학파가 형성될 정도로 확대되었다.

 

예수의 출생을 둘러싼 소문

동양은 예부터 태양이 떠오르는 신비로운 지역으로 서양에 알려졌다. 인류 문명의 발전을 보여주는 세계 4대 종교 모두 동양에서 형성되었다. 불교는 옛 인도인 지금의 네팔 남부에서, 기독교는 팔레스타인에서, 이슬람교는 아라비아 사막에서, 유대교는 시나이 산에서 기원했다. 기독교의 시초인 예수는 유대인이다. 그는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났고 많은 박해를 받았지만 그러한 사실이 역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
상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사람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그리스
도가 바로 예수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원래는 유대를 다시 일으켜 세울 왕 혹은 구세주(메시아)라는 의미였다. 고대 선지자들의 말에 따르면 1세기경 유대인은 하나님이 약속한 구세주가 올 것이라고 기대했으며, 그들은 구세주가 유대인을 구원해줄 것으로 믿었다. 기독교는 오늘날 교인의 수가 가장 많은 종교로 자리 잡았지만 동양에서 서양으로 전파될 때는 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러다 결국 로마제국의 국교로 인정받았고, 그 후 서양에서 교세가 빠르게 확장되었다.
예수는 기원전 6년경, 팔레스타인 지역인 지금의 이스라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갈릴리 지방의 산골마을 나사렛에서 성장했다. 당시 이곳은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고, 세금 징수를 위한 인구조사가 시작된 때라서 모든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 신고를 해야만 했다. 예수를 잉태하고 있던 마리아도 남편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야 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장차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를 낳을 것이라고 알렸다. 마리아는 매우 당황하여 “저는 목수 요셉과 정혼하고 아직 잠자리를 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습니까?”라고 했다. 마리아는 동정녀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상식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이 될 요셉 역시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가 임신한 것은 음탕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유대교 율법에서는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 죽이는 것이 정당하지만 요셉은 그런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아 은밀히 파혼하려고 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 말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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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라 하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마태복음」 1:20~21).

요셉은 천사의 명을 좇아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이고 신의 아들이 태어날 날을 고대했다. 마리아는 배가 불러 몸이 무거웠지만 호적 신고를 하기 위해 요셉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갔다. 베들레헴은 요셉의 선조 다윗이 살았던 곳이다. 『신약성경』에는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에서 여인숙을 구하지 못해 마구간에서 밤을 지새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리아는 예수를 낳아 말구유에 눕혔고 이로써 말구유는 신의 아들 예수의 요람이 되었다. 요셉은 예수가 태어나기 전까지 마리아와 동침하지 않았고 그 이후에
서야 동침하여 몇몇의 아들과 딸을 낳았다. 당시 사람들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무성한 소문 속에서 마리아는 음탕한 여인이란 멍에를 짊어지게 되었다. 요셉도 간음한 여인의 남편이라는 오명을 살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사생아라고 생각한다.
요셉은 하층민인 목수였다. 예수는 어려운 경제적 환경과 유대 전통생활 속에서 성장했다. 관습에 따라 아버지에게서 목수 일을 배우며 동생들을 돌보았다. 아버지가 타계한 후에는 경제적인 책임을 지고 홀어머니와 동생들을 보살폈다. 예수가 하느님의 뜻을 좇아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것은 서른 살이 되어서였다. 그가 복음을 전파한 기간은 3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고 유대교 지도자들의 심한 반대와 박해를 받
았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신의 아들로 행세하는 예수를 로마제국의 손을 빌려 십자가 사형으로 처단했다. 예수도 처음에는 유대교 교인이었다. 태어난 지 8일째 되던 날 요셉과 마리아는 모세 율법에 따라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리고 가서 할례의식을 행했다.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라는 율법에 따라 예수를 하느님에게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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