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공자의 출생을 둘러싼 소문

공자는 춘추시대 노나라 창평향 추읍1 에서 출생했다. 이름은 구丘, 자字는 중니仲尼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상가이자 교육자로 꼽히며그의 사상은 훗날 중국문화의 주류가 되었다. 그는 ‘성인’, ‘소왕’,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란 칭호로 추앙받았다. 공자의 출생은 관련 서적이 유실되어 역사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되었다. 가장 신뢰할 만한 기록으로 사마천2 의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가 있다.
숙량흘과 안씨 여인이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 숙량흘은 공자의 아버지로 숙량叔梁이 자, 흘紇이 이름이다. 야합野合은 ‘밖에서 낳았다’는 뜻으로 정식으로 결혼하여 낳은 자식이 아닌 오늘날의 사생아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사기』 「공자세가」의 기록을 보면 공자는 태어났을 때 보통 아이와 다르게 정수리가 움푹 들어가 있어 이름을 구
(언덕)라고 지었다 한다. 공자의 일화 모음집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따르면 숙량흘은 노나라의 무장으로 전장에서 공을 세워 추읍의 큰 부자가 되었다. 그는 노나라 시씨 성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딸만 아홉을 낳았다. 당대에는 아들이 없으면 사람들이 경시했기 때문에 첩을 두었다. 첩이 고대하던 아들을 낳자 기뻐하며 맹피孟皮로 이름을 지었으나 태어날 때부터 다리에 병이 있어 크게 실망했다. 그래서 다시 안정재를 맞아들였다. 이때 그의 나이 66세였지만 안정재는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았다. 춘추시대에 늙은이가 젊은 여인을 아내로 맞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당나라의 역사학자
사마정은 “오늘날 이를 두고 야합이라고 하는 것은 나이 많은 숙량흘이 어린 안정재를 취했기 때문으로, 이는 예의에 맞지 않는다”(『사기색은史記索隱』)라고 했다.
당나라의 또 다른 역사학자 장수절은 『사기정의史記正義』에서 당시 야합에는 길함과 아름다움이 내포되어 있었으나 훗날에 이르러 오늘날 이해하는 간통의 의미로 굳어졌다고 주장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젊었을 때 천하게 지냈기 때문에 변변찮은 잔재주에 능하게 되었다”(『논어』 「자한子罕」)라고 한 공자의 말을 근거로 그의 어머니가 빈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숙량흘과 야합해서 공자를 낳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훈고학의 시조인 동한 시대 정현은 “공자의 아버지는 추읍의 숙량흘이고 안정재라는
처녀와 야합해서 공자를 낳았다. 안씨는 수치스러워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라고 대놓고 말했다. 그의 말 때문에 야합이 강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공자의 후손과 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옛사람들이 치른 야합은 강간과 전혀 관련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사마천이 공자를 향해 ‘높은 산 바라보며 넓은 길 걸으리라. 비록 도달할 수는 없더라도 마음만은 그곳을 향하도다’라며 존경하는 마음을 표했을 리 없다”
라고 반박했다.
야합을 자유로운 성행위(私通)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당시 사통은 보편적 사회현상으로 남녀의 자유로운 결합을 말한다. 춘추시대의 민요를 모은 가장 오래된 시집으로, 오경3 중 하나인 『시경』에는 남녀의 자유로운 결합을 칭송하는 시가 아주 많다. “봄의 두 번째 달에 남녀를 만나게 하는데 이때만큼은 절차를 밟지 않고 자유롭게 성교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라고 쓰여 있다. 당시의 풍속과 제도로 볼 때 남녀관계에 상당히 개방적이었고, 야합과 자유로운 성행위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따라서 야합을 현재의 의미로 간주하여 공자를 사생아로 보는 관점은 옳지 못하다.
공자에 관한 기록이 상세하지 않아 그의 출생과 관련된 갖가지 이야기가 무성하다. 동한 시대에 미래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서적이 유행하면서 공자를 신격화하기 시작했다. 정현은 『예기』 「단궁정의檀弓正義」의 ‘논어찬고참論語撰考讖’을 인용하여 “숙량흘과 안정재가 니구 산에서 기도하여 흑룡의 정령을 감동시키고 중니를 낳았다”라고 했다.
전한 시대의 유학자 동중서는 하늘과 사람이 감응하고 유학과 신학을 결합한 신학 목적론을 제창했다. 그 후 유가의 저작들은 점차 경전화되고 신비로운 색채를 띠어 공자는 평범한 사람이 아닌 신으로 추앙받았다.
후세인이 공자를 끝없이 신격화했어도 공자 자신은 예언자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논어』 「술이述而」에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해 부지런히 탐구하여 알게 된 것이다”, “공자께서는 괴이함과 폭력, 패란과 귀신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선지자적 지위나 신과의 관계를 부정했다. 이 때문에 그를 유교의 교주로 삼으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공자는 박학다식한 사람이었다. 본래 그는 서당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평범한 선생이었지만 죽어서는 지덕이 높은 스승, 즉 지성선사至聖先師로 추앙받아 다른 선생들보다 높은 위치에 서게 되었다. 기원전 2세기에 이르자 유학자들은 공자가 하늘의 명을 받들어 주나라를 이을 왕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1세기에는 공자가 왕보다 높은 지위에 올라 신이 되었고 앞으로 한漢나라가 세워지리라 예언한 것으로 전해졌다.
공자는 선지자나 신이 아니지만 중국의 성인, 동아시아의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그는 지식인이었으며 노자의 가르침을 배웠고 문화의 교류를 주장했다. 그리고 맹목적인 추종에 반대하고 인애仁愛를 강조했으며, 제자들이 책을 읽고 이치를 깨닫도록 가르쳤다. 그의 사상은 중국에서 출발하여 한국, 일본,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들로 점차 전파되었다.
공자는 중국의 자산이자 세계의 자산으로 시공을 초월한 사람이다. 그의 사상은 2천여 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중국에는 지금까지 순수 유학, 유교와 도교가 융합된 유학,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가 융합된 유학, 유불선과 기독교가 융합된 유학 등 네 가지 유학이 형성되었다. 오늘날에는 다양하게 융합된 또 다른 유학이 막 형성되어 가고 있다. 공간적으로 보면 그의 사상은 중국의 것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공동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중국의 유학 외에도 일본의 유학과 일본의 공자가 있고 한국의 유학과 한국의 공자, 싱가포르의 유학과 싱가포르의 공자도 있다. 심지어 프랑스의 유학과 프랑스의 공자도 있다. 모두 문화 교류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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