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버트런드 러셀의 『철학의 문제들』

 

버트런드 러셀은 이 책을 일반 독자용으로 급히 집필한 값싸고 짤막한 책이라는 의미에서 ‘싸구려 소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철학의 문제들』은 첫 번째 판이 나온 뒤 지금까지 약 1세기 동안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이 책은 비록 러셀의 주요 철학서는 아니지만, 그의 여러 저서 가운데 『서양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와 더불어 가장 인기 있는 책으로 꼽힌다. 이 책은 100년 전인 1911년에 완성되어 1912년 1월에 출판되었으며,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려는 학생들이 꼭 읽어야할 필독서였다. 『철학의 문제들』이 이처럼 꾸준히 사랑받은 가장 그럴듯한 이유는 러셀 특유의 철학관이다. 그는 이 책에서 데카르트, 버클리, 흄, 칸트 같은 여러 철학자들의 사상을 간략한 요약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러나 철학의 한계와 가치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를 상세히 피력할 때에는 철학을 향한 러셀의 뜨거운 열정과 진심이 드러난다. 『철학의 문제들』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독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이 책은 이미 여러 차례 대학생들을 상대로 진행한 무미건조하고 매우 추상적인 강의도 담겨있지만, 일반적인 철학입문서 수준을 뛰어넘는 부분도 있다. 따라서 러셀의 주장이 요약적으로 제시된 문장 하나하나를 제대로 소화하려면 기본적인 철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제목 the title

‘철학의 문제들’이라는 제목이 무색하게도 이 책은 무척 좁은 범위의 철학적 문제를 다룬다. 이 책의 주된 관심사는 우리가 알 수 있는 바의 한계, 즉 인식론이다. 따라서 윤리학, 미학, 정치철학, 종교철학 같은 여러 중요한 철학 분야는 부차적으로 언급할 뿐이다.

러셀이 제목에서 ‘문제들’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철학과 관련한 문제가 수학 문제와 다름없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러셀은 철학이 직접적인 정답이 있을 수 있는 여타 분야와는 다르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이 책 전체에서, 특히 마지막 2개의 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 러셀의 철학관 중 하나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what is philosophy?

과거의 몇몇 위대한 철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철학이 실재의 궁극적 본성, 옳고 그름, 아름다움 등 중요한 형이상학적 문제를 풀어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러셀은 그것을 헛된 희망이라고 일축한다. 철학은 간단한 해답을 내놓지 못한다. 철학자들은 질문을 던지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내놓지 못할 때가 많다. 러셀은 철학자들이 던지는 대부분의 질문에 철학이 그다지 확실한 대답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철학이 시간낭비라는 뜻은 아니다. 심오한 철학적 질문은 삶을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들고, 안락한 전제의 표피 바로 밑에 무척 낯선 세계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실재에 관한 지식을 얻고자 철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실망하기 쉽다. 하지만 철학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은 확실하지 않은 우리의 신념을 정리하고, 우리가 그런 신념을 갖는 방식에 관한 식견을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설령 우리에게 확실성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해도 철학은 우리가 아무런 점검을 하지 않을 때보다는 기본적인 신념에서 오류를 저지를 가능성을 낮춰줄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여러 가지 철학적 문제가 나중에는 과학적 문제가 되었지만, 철학과 과학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과학은 우리가 그것을 직접 연구하지 않아도 무척 유용하게 쓸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밑바탕이 되는 과학적 원리를 알든 모르든 간에 의학이나 과학기술의 혜택을 입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철학은 다르다. 철학 연구는 철학적 문제를 숙고하는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철학을 연구하지 않은 사람들은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을 통해서만 철학의 혜택을 입을 수 있으며, 직접적인 혜택은 전혀 없다.

하지만 러셀은 철학의 진정한 가치가 불확실성에 있다고 선언한다. 가령 우리의 신념에 전혀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면, 비판적 평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편견에 빠질 수 있다. 반면 철학적 접근법을 통해 지금까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 신념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면 ‘관습의 횡포’에서 벗어나고, 세계의 경이로움과 우리가 이 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해 한층 유연하게 반응할 것이다. 이런 가능성이 열리면 우리의 상상력은 한층 풍부해진다. 철학적 관조를 통해 우리는 삶을 순전히 개인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우주의 일원’으로 변모할 수 있는 길로 나아간다. 우리는 이 공명정대한 정신의 위대함을 관조함으로써 정신적으로 성숙해진다. 인류에게 철학의 가치는 바로 이와 같은 여러 요인들이 조화를 이루는 데 있다.

흔히 말하는 합리주의는 전통적인 철학적 접근법 가운데 하나로, 실재의 본성에 대한 진리를 선천적으로, 즉 경험과 무관하게 오직 이성에 의존해 증명하려는 것이다. 반면 러셀의 설명은 철학자를 과학의 ‘조수underlabourer’에 비유한 존 로크의 설명과 아주 비슷하다(비록 러셀은 이 점을 밝히지 않지만). 러셀에게 철학이란 우리가 과학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원리를 살펴보고 그것의 모순을 밝혀내는 활동이다. 하지만 러셀은 이와 같은 접근법이 모든 사물을 의심하는 유해한 회의주의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믿었다. 『철학의 문제들』의 한 가지 주제는 의심을 초월하는 신념, 이를테면 우리의 지각적 경험이 존재한다는 신념 같은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물리적 대상들이 정말로 우리 눈에 보이는 것과 같은가에 대한 신념은 철학적 의심을 받을 수 있다. 『철학의 문제들』에서 대체로 러셀은 감각과 이성을 통해 포착되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둘러싼 질문에 초점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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