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
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의 『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
『 니코마코스 윤리학 』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용적인 사람이었다. 비록 플라톤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는 스승의 사상, 즉 실재는 일상의 세계 너머에 있는 이데아계에 놓여있다는 사상을 거부했다. 그는 플라톤의 동굴의 신화를 믿지 않았다. <아테네 학당>(1511)이라는 라파엘의 그림에서 플라톤은 하늘 쪽으로 이데아들을 가리키고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 반대로 이 세상 쪽을 가리키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분야는 철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는 최초의 위대한 생물학자 가운데 하나였다. 철학에서 그의 관심범위는 매우 넓어서,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학 그리고 미학을 망라한다.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한낱 강의 노트 모음집일 뿐이며, 필체가 고르지 않고 곳곳의 내용이 불명확하며 출간을 위해 작성된 것이 아님이 분명할지라도, 윤리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저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책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인간 존재를 향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본 물음을 묻는다. 이 물음은 고대 윤리적 토론의 중심에 놓여 있었지만, 슬프게도 20세기 철학자들에게는 무시되어진 그런 물음이다. 그의 대답은 비록 복합적이고 곳에 따라 야릇하기도 하지만, 문명사적인 뚜렷한 표식으로서 뿐만 아니라 현대의 철학적 토론에 미친 지대한 영향을 보더라도 매우 중요하다.『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압축적이고 복합적인 저작이며, 학자들은 그것의 정확한 해석을 놓고 논쟁을 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심 주제는 쉽게 잡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했던 주요 용어들 가운데 몇몇은 영어로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를 논하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혼동스럽고 엇비슷한 영어 번역어에 의존하기 보다는, 몇몇 그리스어의 음역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더 간단명료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용어들 가운데 하나이자 매우 중요한 것이 바로 ‘에우다이모니아’이다.
에우다이모니아: 행복한 삶 eudaimonia: a happy life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는 흔히 ‘행복’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런 번역은 심각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번창하기flourishing’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조금 어색하기는 하지만 더 적절한 번역이다. 이 번역은, 예를 들어 식물의 번창과 사람의 번창 사이의 유사성을 시사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믿기에 우리 모두는 ‘에우다이모니아’를 원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모두는 우리의 삶이 잘 되어가길 원한다는 것이다. 번창하는 삶은 성공적인 삶이다. 이것은 만일 우리가 이것을 성취할 수만 있다면 우리 모두가 선택하고 싶어하는 그런 종류의 삶이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리기를 바라는 그런 종류의 삶이다. ‘에우다이모니아’는 언제나 목적으로서 추구되며, 목적을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가령, 값비싼 옷을 사기 위한 수단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돈을 추구할 수 있다. 이 옷이 우리가 원하는 사람의 마음을 끌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비싼 옷을 산다. 우리가 원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잘 진행시킬 수 있게 해주리라 믿기에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끌고 싶어 한다. 그러나 “왜 우리는 우리의 삶이 잘 되어가길 바라는가”라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에우다이모니아’는 다른 그 어느 목적에도 기여할 수 없다. 그것은 이런 종류의 설명의 연쇄가 끝나는 지점에 있다. “왜 ‘에우다이모니아’를 추구하는가”라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에우다이모니아’란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그런 것이다”라는 명제는 ‘개념적인 참’이기 때문이다. ‘에우다이모니아’가 목적 그 자체로서 추구되는 유일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가령 음악을 듣거나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이런 활동으로부터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얻으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그냥 이런 활동이 우리를 세상사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라도 우리는 맞든 틀리든 그 활동이 ‘번창하는’ 삶의 구성 요소라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에우다이모니아’를 추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해 더 많이 안다면, 그것을 성취할 가능성은 더 커질 것이다. 설령 궁극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믿었듯이, 초창기의 훈련과 현재의 물질적 환경이 옳은 길을 따를 우리의 능력을 크게 결정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후대의 많은 도덕 철학자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통제를 넘어선 사건들이 우리 삶의 성공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현실적이었다. 그는 어느 정도의 재산과 그럴듯한 외모, 훌륭한 가문과 자손을 가지는 것은 진정한 번창하는 삶을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자산의 혜택 없이, 우리는 최고의 ‘에우다이모니아’ 상태를 성취할 수 없을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어쨌든 우리는 현재 처한 특정 상황에 우리의 행위를 맞추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잘 사는 일은 삶의 특정 상황에 우리의 행위를 적응시키는 것이지, 특수한 경우에다 일반 규칙을 적용하는 문제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지성의 목적은 오로지 당신이 일하고 있는 분야에 적절한 종류의 정확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여러 판단은 오직 대부분의 경우에 대해서만 참일 뿐이다. 그 판단들은 모든 경우의 모든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못하며, 따라서 불요불굴不撓不屈의 규칙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윤리학은 수학과 같은 엄밀한 분야가 아니다. 직각에 대한 목수의 관심은 실용적인 것이어서 기하학자의 관심과는 아주 다르다. 윤리학을 자체의 고유한 일반성의 기준을 갖춘 실용적 분야로 보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잘못된 생각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실용적 분야로서의 윤리학은 단지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더 나은 이론적 이해를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좋은 사람이 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우리 모두가 ‘에우다이모니아’를 추구하고 있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고 믿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적 탐닉의 삶을 주장하는 쾌락주의자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 그는 섹스 및 먹고 마시기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가축의 수준으로 끌어내린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에우다이모니아’가 정신적 희열의 상태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활동이자 삶의 방식이며, 그 자체의 즐거움을 가져다주지만 개별적 행위들에 대해 평가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우리가 어떤 개인이 ‘에우다이모니아’를 성취했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개인의 삶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한 마리의 제비가 여름을 가져다주지 못하며, 하루의 행복한 날이 행복한 인생을 보장하지 못한다. 당신 인생의 끝 무렵에 일어난 비극이, 당신의 인생이 전체적으로 원만했는지 아닌지의 문제에 결정적인 방향전환을 일으킬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어떤 사람이 죽기 전까지는 그의 인생을 ‘번창한 삶’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생각은 어느 정도 진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심지어 어떤 면에서 당신이 죽은 뒤의 사건들이 당신의 인생이 원만했는지의 평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고찰하기도 한다. 그의 대답은, 당신이 죽은 뒤 당신 후손들의 성공은 어느 정도나마 당신의 ‘에우다이모니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