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니카는 1937년 4월, 독일 폭격기의 공격을 받았다

 

 

 

 

1938년 6월 6일 월요일 이른 아침, 프로이트는 런던의 빅토리아 역에 발을 디뎠습니다. 열차가 빅토리아 모퉁이 맨 끝에 멈춘 덕에 프로이트는 수많은 인파가 그를 맞이하기 위해 몰려드는 걸 피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 신문이 그의 망명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사람들은 그가 도착하기를 열렬히 기다렸습니다.

피곤에 지친 프로이트는 새 집을 구경하고 싶어 했습니다. 어니스트 존스가 런던 중심부를 지나 스승의 새 집이 있는 북쪽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런던 사람들의 마음을 관통한 최근의 사건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이 아니라 게르니카Guernica 폭격 사건이었습니다. 스페인 북부 바스크Badque 지방에 있는 게르니카는 1937년 4월, 독일 폭격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프랑코Francisco Franco, 스페인 파시스트와 동맹을 맺은 독일은 스페인을 군사훈련기지이자 신무기를 실험하는 곳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게르니카에서 신무기들은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뒀습니다. 공격은 사람들이 모두 거리로 나온 장날에 있었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무시무시한 학살이라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처칠은 게르니카 폭격을 두고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공포”라고 했습니다. 파블로 피카소는 귀청을 찢을 듯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을 질러대는 사람과 동물들의 모습을 화폭에 옮겼습니다. 그것은 조국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군인들의 만행을 고발하는 그림입니다.

1938년 봄, 전문가들은 독일과 전쟁이 시작되고 처음 14일 동안 런던에 폭탄 수만 톤이 떨어질 거라고 했습니다. 폭탄 1톤이 떨어질 때마다 사상자 50명이 나올 것이라는 전문가의 계산에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영국 최고의 지성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1872-1970)은 “런던은 거대한 광란의 장이 될 것이다. 병원에는 응급환자들이 쇄도하고, 교통은 마비되며, 노숙자들은 도와달라고 비명을 질러댈 것이다. 도시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고 적었습니다. 사실 런던에 떨어진 폭탄은 10만 톤에 이르지 않았고, 사상자도 전문가들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적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프로이트가 도착했을 때 네빌 체임벌린 총리가 히틀러를 달래지 못하면 런던도 얼마 뒤엔 제2의 게르니카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1938년 6월, 프로이트는 평화로운 겉모습과는 달리 전쟁 가능성에 떨고 있는 런던에 도착한 것입니다.

런던 시내를 구경한 프로이트와 일행은 임대한 엘스워시 가Elsworthy Road 39번지 앞에 멈췄습니다.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매혹적인 나의 작은 집, 서재에서 밖을 내다보면 베란다를 통해 화단으로 틀리 잡힌 정원과 공원에 뿌리를 박은 커다란 나무가 보인다. 우리처럼 넓은 곳(수평으로)에 살던 사람들이 몇 층으로 된 곳(수직으로)에 사는 건 힘든 일이다.

수평생활을 하던 베르크가세 19번지를 떠나 계단이 있는 집으로 옮긴 프로이트는 거실에 가기 위해 힘겹게 계단을 내려가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새 집은 프로이트에게 흥미진진한 곳이었습니다. 그의 망명에 특히 관심을 보인 『데일리 헤럴드 Daily Herald』는 프로이트의 새 거주지를 두고 “선명한 초록색 대문이 있는 조용하고 넓은 현대식 주택, 꽃밭은 형형색색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정원 뒤에는 리전트 파크가 있고, 프림로즈 힐Primrose Hill도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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