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예술에 반대하여

 

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예술에 반대하여 aganist art

수호자들의 교육에 관해 설명하면서 플라톤은 다양한 종류의 시들은 통제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신들이나 영웅들에 대한 그릇된 인상을 주는, 또는 학생들에게 큰소리로 낭송됨으로써 자칫 학생들이 불의한 인물을 추종할 위험이 있는 글은 무엇이든 금지될 수 있다. 『국가』 제10권에서 그는 이상사회에서의 예술과 그 지위에 관한 주제로 되돌아온다. 그는 모방 예술, 즉 실재를 재현하고자 하는 예술에 초점을 맞춘다. 그의 결론은 그런 예술은 자신의 국가에서는 자리 잡지 못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첫째로, 그런 예술은 현상의 모방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우리를 이데아의 세계에서 더 멀리 떼어놓기 쉽다. 둘째로, 모방 예술은 우리 영혼의 비이성적인 부분에 호소하며, 따라서 정의에 필수적인 심적 조화를 해치기 쉽다.

첫 번째 종류의 비판을 설명하기 위해 플라톤은 침대를 그리는 화가의 예를 든다. 신은 침대의 이데아를 창조했다. 목수는 그 이데아의 어렴풋한 모방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화가는 목수의 모방물에 대한 모방물을 그렸다. 이런 행위는 하나의 진정한 침대에 대한 이미 불완전한 이미지인 것을 또다시 거울을 통해 비추는 것과 다름없다. 결국 예술가는 실재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돕기보다는 오히려 방해하는 것이다. 예술가는 침대의 참된 본질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개별적 침대의 현상을 모방하는 일에 만족한다. 플라톤은 시인들도 화가와 어느 정도 마찬가지 일을 한다고 생각하여 시 예술도 인정하지 않는다.

플라톤이 인정하듯이 모방 작가들의 작품은 여전히 유혹적이다. 이런 작품은 이성에 호소하지 않으며, 다만 영혼의 저급한 부분에 호소할 뿐이다. 그 효과는 선한 충동보다는 악한 충동을 묘사하는 작가들의 경향에 의해 더욱 악화된다. 모방 예술가들은 부주의한 사람들을 지식에 이르는 길에서 멀어지게 만들 수 있다. 때문에 국가에 이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국가』에 대한 비판 criticisms of Plato The Republic

국가와 개인의 유비가 약하다

『국가』에서 보여준 플라톤의 전체 기획은 국가의 정의와 개인의 정의 사이에 강한 유비가 있다는 전제에 의존한다. 만일 이 유비가 약하다면, 정의로운 국가에 대한 결론에서부터 도출된 개인의 정의에 관한 결론도 마찬가지로 모두 약할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개인에로의 진행이 명백하게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진행이 정당화되는지의 여부는 적어도 문제 삼을만하다. 오직 통치자들만이 정의로울 수 있다

나아가서 플라톤의 이론은 오직 통치자들만이 정의로울 수 있다는 결론을 낳는 듯이 보인다. 정의를 ‘마음의 조화’로, 국가의 각 계급을 ‘행위를 유발하는 지배적인 원천’으로 정의하고 나면, 이성이 가장 많이 지배하는 사람들만이 정의롭게 행위 할 수 있음은 분명해진다. 통치자들이야말로 이런 지위에 있는 유일한 계급이다. 그러므로 오직 통치자들만이 정의로울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플라톤은 이것을 자신의 이론에 대한 심각한 반대라기보다는 빛을 밝히는 가르침으로 여겼을지 모르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이런 결론은 플라톤의 사유 속에 내재한 비타협적 엘리트주의를 드러내 보여준다.

‘정의’의 애매성

플라톤이 정의란 영혼의 세 부분이 조화롭게 기능하는 일종의 정신적 건강함이라고 말할 때, 그는 ‘정의’의 일상적 의미를 저버리는 듯이 보인다. 그는 정의라는 개념을 자신의 목적에 맞도록 제멋대로 재정의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 개념을 두 개의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듯이 보인다. 왜 우리가 ‘정의’를 꼭 이런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물론 이런 비판에 대해 플라톤은 자신의 정의 개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대응할 것이다. 플라톤의 정의로운 개인은 자신의 몫이 아닌 것을 훔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몫보다 더 많이 취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행위는 이성이 더 저급한 욕망들에 굴복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이해는 다음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듯이 보인다. 즉 어떤 사람의 행위가 ‘정의롭다’고 일컬을 만하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조화로운 정신적 기능보다 저급한 동기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플라톤의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할 수 있다. 그들은 단순히 정의롭게 행위하려는 욕구를 가지지만, 이성 능력은 아주 미숙할 수도 있다.

기만을 포함한다

플라톤이 제시하는 논증의 몇몇 중요한 요점에는, 국가와 국민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기 위한 거짓말을 옹호하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금속의 신화에 관한 이른바 ‘고귀한 거짓말’이 있으며, 짝짓기 제비뽑기에도 거짓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거짓말이 용납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상국가는 이런 기만 위에 세워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 점에 대해 무심한 듯이 보인다. 플라톤의 관심은 최종의 결과와 그 결과를 얻기 위한 최선의 방법에 있지, 그 최종의 결과가 어떻게 얻어지는지에 관한 도덕적 문제들에 있지 않다.

이데아론은 그럴 법하지 못하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이상국가를 지지하는 논증들의 중요한 기반을 제공한다. 그렇지만 이데아론은 오늘날 대부분의 철학자들에게 그럴 법하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아마도 가장 내키지 않는 부분은, 이데아들이 실재로 존재한다는 주장과 이것들이 실재이며 관찰되는 세계는 단지 이것들의 어렴풋한 복사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데아론을 내던져버린다면, 플라톤의 제안들 가운데 많은 것들을 떠받치고 있는 형이상학적 버팀목들이 제거될 것이다. 예를 들어 철학자들은 실재에 관한 지식을 얻는 일에 특히 재능이 있다는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철학자들에게 이상국가의 통치를 맡길 명백한 정당성이 없어질 것이다. 또한 국가가 모방 예술을 금지해야 할 분명한 이유도 없어질 것이다. 전체주의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아마도 플라톤의 『국가』를 겨냥한 가장 중요한 비판은 이 책이 전체주의를 위한 처방전을 제공해준다는 점일 것이다. 우생학, ‘고귀한 거짓말’, 가족의 폐지, 예술에 대한 검열로 무장한 국가는 삶의 모든 영역을 침범할 것이다. 플라톤 식의 세상에서 개인은 국가의 요구에 복종해야만 하며, 목적을 위해 모든 종류의 개인적 자유를 희생하도록 요구된다. 개인의 자유와 선택의 자유를 값지게 여기는 우리들은 플라톤의 비전에서 아무런 매력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