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정신분석학회를 해산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1930년대 빈은 사회적, 정치적으로 극도의 풍랑을 맞았습니다. 1929년 대공황은 유난히도 오스트리아를 강타했습니다. 1931년 5월, 빈 최대 은행 크레디탄스탈트Creditanstalt는 파산을 선언했습니다. 1933년 2월에 노동 인구의 25%가 비고용 상태였습니다. 1년 뒤에는 2월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붉은 빈’으로 불린 사회민주주의와 볼셰비키가 일으킨 이 반란은 엥겔버트 돌푸스 정부에 잔인하게 진압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섯 달이 채 지나지 않아 1934년 7월의 쿠데타 이후 돌푸스는 오스트리아를 반쯤 침략한 데 성공한 나치와 히틀러에게 암살되었습니다.

1930년대 초, 중반 프로이트의 경제적 상황은 안정적이었지만, 빈에 사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전도유망하던 일자리가 사라졌고, 하루아침에 가난뱅이가 되었으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구두끈이나 사과를 팔았고, 자부심이 강한 부르주아들이 친척에게 동냥해야 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정신착란을 일으킨 세상이었습니다. 3월 14일 월요일, 빈으로 향하던 히틀러는 많은 사람들에게 현대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지도자로 인식되는 분위기였습니다.

히틀러가 빈에 도착하기 전날 밤, 프로이트는 베르크가세 19번지에 빈 정신분석학회를 소집했습니다. 그는 모든 회원과 악수하면서 말했습니다. “현재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소.” 결국 학회를 해산하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1933년 권력을 쟁탈한 나치는 예상과는 달리 베를린 정신분석학회를 폐지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학회를 인수하고, 유대인 정신분석학자들을 해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하고 위대한 독일제국 원수Reichsmarschall라는 특별 지위를 부여한 헤르만 괴링Hermann Göing(1893-1946)의 사촌 M.H. 괴링에게 지휘권을 넘겼습니다. 나치는 정신분석학이 과학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 한 가지 조건을 덧붙였습니다. 정신분석학은 유대인에게 한정된 과학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이 정신분석학을 창조하고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발견한 내용 역시 유대인에게만 적용되었다는 걸 의미합니다. 유대인이 오이디푸스콤플렉스에 사로잡힌 민족, 무의식이 폭력과 성으로 무장된 민족, 유아기부터 성 정체성을 갖기 쉬운 민족으로 여겨진 것도 이 때문입니다.

나치가 정권을 탈취하고 얼마 뒤 카를 융은 아리아인의 심리적 특성과 유대인의 심리적 특성에 대해 이론적 관찰을 했던 베를린에서 연속 강연을 했습니다. “아리아인의 무의식에는 유대인보다 많은 잠재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야만 상태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지 못한 젊음의 장점이자 단점입니다.” 괴링학회의 이론적 연구는 아리아인의 심리에 대해 여러 이론들을 포괄적으로 짜깁기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3월 14일 오후 히틀러는 메르세데스 오픈카를 타고 왼손으로는 바람막이용 유리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자신을 환영하기 위해 몰려든 군중에게 답례하면서 빈 거리를 돌아다녔습니다. 걸출한 건물들이 대부분 독일 깃발로 휘감겼습니다. 만자 십자장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고, 군중은 함성을 질렀습니다. 군중에게 완전히 노출되어 암살당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히틀러는 절대자로서 자신감을 갖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독일 부대가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오자마자 빈에 있는 유대인들은 공격당하기 시작했습니다. 돌격대원 무리는 거리마다 우레와 같이 몰려들어 유대인을 폭행하고 망신 주었습니다. 나치 당원들은 유대인의 집과 사무실을 부수고 들어가 그곳에 있는 이들을 폭행하고 갖고 싶은 물건들을 마음대로 가져갔습니다. 거리가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막혀 있던 인종 혐오의 물꼬가 트이면서 폭발한 것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자살했습니다. 유대인 남자와 여자 수백 명이 나치의 변소를 청소하기 위해 수감되었습니다. 때로는 청소도구를 이용했지만, 때로는 손으로 직접 닦아야 했습니다. 돌격대원들은 백발이 성성한 유대인 노인들을 유대교 회당으로 데려가 무릎을 꿇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하일 히틀러!”를 외쳤습니다.

유대인들은 빈을 떠나려고 했지만, 국경선을 넘자마자 젊은 오스트리아 돌격대원들이 기차역마다 급파되어 떠나려는 유대인들을 저지했습니다. 탈출하려던 유대인들은 빈으로 돌아와 대부분 체포되었습니다. 나치는 합병 하루만에 2만1천 명을 체포해 다카우Dachau로 보냈습니다. 그 해 말 1,500명을 제외한 모든 이가 풀려났는데, 그들 대부분 다시 체포되어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나치는 유대인을 감옥에 내던졌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이 몇 세대에 걸쳐 일군 사업체를 몰수했습니다. 그들은 아파트 건물에 침입해 거주자들을 거리로 몰아내고 자신들이 들어가 살았습니다. 그들은 자식 앞에서 우대인 부모를 모욕하고 침을 뱉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이 특정 공원의 벤치에 앉는 걸 금하고 유대인이 활동하는 걸 막았습니다. 어리석은 오스트리아인은 반유대주의의 선봉이 되었습니다.

시민들은 빈의 문화에 자부심이 대단했을 뿐만 아니라 빈을 계몽된 사회적 관용의 중심지라고 여겼습니다. 빈은 다양한 인종과 나라가 공존한 곳으로 독일인뿐 아니라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루테니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크로아티아, 헝가리, 루마니아, 이탈리아 사람들이 모두 만날 수 있었습니다. 며칠 사이에 빈 시민들은 유대인에 대한 광포한 폭력에 열렬한 반응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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