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루이 다비드의 <테니스 코트의 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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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8월 26일 의회가 ‘인권 선언문’을 공표했다. 선언문 제1조에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와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적혀 있다. 다비드는 선언문을 찬양하는 뜻에서 기념비적으로 아름답게 장식했다98. 그에게도 혁명의 기운이 발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다비드는 사회적 명성을 누리며 왕과 귀족들의 후원을 받기 원했고 또 받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진보주의 사고를 가진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혁명이 개혁과 자유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혁명적으로 과격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조금 늦은 1792년 4월부터였다. 그는 기존 체제에 반감이 많았고 퍽 개인적인 이유에서였지만 아카데미에 대한 반감은 몹시 컸다.
그는 아카데미 회원들의 언행에 분노했으며 비민주적인 처사와 협량하고 반복적인 가르침을 못마땅해 했다. 루브르에 있는 그의 아파트는 아카데미에 반감을 가진 회원과 반항적인 학생들이 정기적으로 회합을 갖는 장소가 되었다. 다비드와 동료들은 아카데미에 자신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파리 코뮌, 의회, 그리고 과격한 쟈코뱅 클럽의 정치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 과격한 성향을 지닌 쟈코뱅 클럽 멤버들은 과거 도미니카 소속의 성 야고보 수도원에서 회합을 가졌는데 야고보James는 라틴어로 쟈코부스Jacobus이고 쟈코뱅은 이 말에서 비롯되었다. 쟈코뱅 클럽의 정치가들과 교류하면서 다비드는 더욱 과격해졌고 개혁을 위해 아카데미가 완전히 폐쇄되어야 한다는 생각까지도 갖게 되었으며 그를 지지하고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지도자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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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0년 9월 27일 새로운 민주적 아트 코뮌이 발족되었는데 3백 명으로 구성된 코뮌의 지도자에 다비드가 선출되었다. 아카데미는 다비드를 회유하기 위해 1792년 7월 그를 부교수에 임명했다. 그러나 1793년 4월 그가 수업에서 모델을 필수적으로 사용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음을 지적당하자 교수에 대한 아카데미의 강압적 태도에 반발하는 편지를 썼다. 결국 다비드는 아카데미 무용론을 주장하게 되었고 국민공회는 그해 8월 12일 모든 아카데미를 폐쇄하고 아카데미의 기물을 압류했다. 다비드에 의해서 이런 불상사가 발생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더라도 이런 결과를 초래한 데 대해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들 가운데 그가 포함되었다. 1789년부터 1791년까지 그는 혁명을 지지했으며 예술에 관해서 만큼은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다비드는 1790년 9월 쟈코뱅 당원이 되었다. 파리 쟈코뱅 당으로부터 혁명을 주제로 한 그림을 의뢰받고 1791년 <테니스 코트의 선서>97, 99~103를 드로잉했는데 1789년에 있었던 사건을 기념하고 기리기 위해서였다. 6백 명의 대의원이 일체가 된 그날의 사건은 혁명의 가능성을 보여준 매우 뜻 깊은 사건이었다. 그는 새로운 프랑스를 탄생하게 한 그날의 사건을 기념비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커다란 크기(세로 7m 가로 10m)로 그려 의회 안에 걸 생각이었다. 그는 그날 현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목격자들의 말을 듣고 그렸다.
이것은 쟈코뱅의 시각에서 본 혁명사회였다. 정치적 이상뿐 아니라 남자들 간의 이상적인 관계를 특유의 기교로 유감없이 그려내었다. 화면 오른편에 양손을 가슴에 대고 억제할 수 없는 감격의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사람이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오른쪽 끝에 선서하기를 거부하는 마르탱 도흐의 모습이 보이는데 의자에 앉은 채 머리를 숙이고 양팔을 가슴 위에 어긋나게 포개고 움츠린 모습이다. 왼쪽 끝 병석에서 부축을 받고 나와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 참석한 모페티 드 라 마이엔의 모습이 보이고 그 오른편에 신부 두 사람 티볼트와 리벨의 포옹하는 모습이 보인다. 양쪽 창문과 왼쪽 입구에는 역사적 사건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몸을 높여 실내를 들여다보고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현장을 보여주는 부모도 보이고 오른쪽 첫 번째 창문에 있는 두 소년은 다비드의 두 아들 샤를과 외젠이다. 작은 발코니에 사람들의 무리가 보이며 그들 가운데 칼을 들고 있는 궁정근위병 뒤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장 폴 마라로 보이는 사람이 열심히 현장 기사를 적고 있다.
하지만 다비드는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드로잉만 남겼는데 작품을 완성하기 전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대의원들의 열기는 뜨겁게 달아올랐으며 창문으로 들어오는 강한 바람이 열기를 식혀주었다. 전제정치에 대한 프랑스 시민의 반발은 이처럼 걷잡을 수 없이 거세었으므로 혁명은 필연적이었다. 1791년 7월 파리 시장 직을 사임한 베일리가 1793년 11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대의원 중에는 변심하여 군주제를 지지한 사람들도 있었다.
다비드는 1791년의 살롱에 이 드로잉만 소개한 것이 아니라 <호라티우스의 맹세>8, <소크라테스의 죽음>10, 그리고 <브루투스의 아들들>88도 함께 소개했는데 그가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자신의 작품을 정치적 선전의 목적으로 사용했음을 알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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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정치에 큰 관심을 나타내면서 다비드는 동시에 상류층 귀족들의 의뢰를 받아 초상화를 그렸다. 초상화는 그의 주요 수입의 원천이었다.
1791~92년에 마담 아델라이드 파스토르의 초상을 그렸는데 이전에 그린 것에 비하면 사뭇 달랐다.107 이는 당시 사회의 일상이 반영된 것으로 상류층 여인의 초상을 그리더라도 아이를 돌보고 가사에 전념하는 여인의 미덕을 찬양하는 작품이 무난했기 때문이다. 배경을 단순하게 한 것으로 미뤄 그가 그림을 속히 완성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바느질하는 마담의 손에는 바늘이 들려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