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하면 평화로워진다
자아가 연속적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우리 뇌가 의식적 경험을 처리하는 방식 때문입니다. 초당 스물두 장의 사진이 모여서 연속적으로 보이는 영화를 만들듯, 경험의 작은 조각들이 연속되고 통합된 것처럼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을 낱장의 사진과도 같은,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일어났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조각난 경험 속에 있는 얇은 조각으로 보지 않고 약 1-3초의 간격을 두고 서서히 움직이며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것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붓다 브레인Buddha's Brain』의 저자 릭 핸슨과 리처드 멘디우스는 실제로 자아가 존재한다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자아를 만들어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합니다.
어떤 순간에서든 자아의 부분들은 다양한 요소에 의존하여 존재합니다. 여기에는 유전적인 요소도 있고, 개인사도 있을 것이며, 기질과 상황도 포함됩니다. 특히 자아는 경험에 대한 느낌에 크게 의존합니다. 느낌이 중립적일 대 자아는 배경으로 물러나지만, 뚜렷하게 즐겁거나 불쾌한 일이 일어나는 순간, 자아는 재빨리 처리 과정의 연속을 거쳐 활성화되어 느낌을 갈망으로, 또 갈망을 집착으로 변화시킵니다. 자아는 강한 욕망 주변에서 체계화됩니다. 어느 것이 먼저인가. ‘내’가 욕망을 만드는가, 욕망이 ‘나’를 만드는가?
자아는 그 자체만으로 전면에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자아 역시 수백만 년 동안 얽히고설키어 이뤄진 진화의 산물로, 오늘날에 와서도 다른 신체 시스템을 통해 나타납니다. 이들 신체 시스템은 음식을 파는 가게에서부터, 별과 행성과 물 등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을 지배하는, 일견 무질서한 듯 하지만 신중한 우주의 물리적 법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소들의 그물에 의존해 있습니다. 자아는 생래적인 것도, 무조건적인 것도, 절대적인 것도 아닌, 네트워크에서 생겨나고 네트워크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자아와 관련된 표현은 마음과 뇌에 풍부합니다, 이들 정보와 신경 활성은 분명 실재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가리키고 있는(암묵적이든), 외현적이든 통합되고 지속적이며, 독립적인 ‘나’, 경험의 핵심 주체이며 행동의 주인인 ‘나’는 실재하지 않습니다. 뇌 속에서 자아와 관련된 활동은 여기저기 분산된 복합체일 뿐이지 통합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들 활동은 다양하고 일시적이어서 지속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또한 신체와 외부 세계의 관계와 같은 변화하는 상황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아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해서 우리의 자아가 실존하는 것은 아닙니다. 뇌는 다양한 자기화와 주관성 요소들을 묶어서 균일하고 일관되며 연속적인 자아의 환상을 만들어냅니다.
자아를 어떤 대상과 동등하게 여기는, 즉 동일시하는 것은 자아가 자라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불행히도, 우리가 무언가를 자신과 동일시할 때, 그 대상의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맙니다. 그러나 세상 만물은 반드시 소멸합니다.
경험이 의식을 통해 흘러가게 하되 그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자아는 소유에서 자라납니다. 자아는 주먹 쥔 손과도 같다. 손을 펴서 내어주면 주먹은 사라지고 자아도 사라집니다.
대개 자아는 자만에서 유래하므로, 그 반대는 겸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하다 함은 자연스럽고 잘난 체하지 않는 것이지 남에게 명시 당하고, 굴욕 당하거나 열등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단지 우리가 자신을 남들 위에 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겸손하면 평화로워집니다. 남에게 감명을 주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고 허세와 비판으로 남을 적으로 돌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잘 보살펴야 겸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뇌 속의 자아 네트워크는 위협을 느끼거나 지지를 얻지 못한다고 느낄 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작동을 줄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근본적 필요를 이해하고 잘 돌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