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의 <수련>을 위한 오랑제리 뮤지엄



 



 

 

 

1912년 로댕이 소장하고 있던 자신의 작품과 과거에 수집한 친구들의 그림 모두를 정부에 기증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모네와 클레망소는 로댕의 행위에 대해 공식적으로 찬사를 보냈습니다. 모네도 로댕의 전례를 따라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작품을 정부에 기증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뒤랑-뤼엘은 모네의 작품에 대한 수요가 너무 큰 데다 경쟁자들이 많아 모네 작품에 대한 독점권을 확보하지 못하고 베르넹 죈 형제와 공유해야 했는데, 이들 형제는 지베르니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며 모네의 작품을 가능한 한 많이 구입했습니다. 모네의 그림 값은 자꾸만 뛰어 모네가 타계하기 2년 전, 1924년에는 한 점에 4-5만 프랑에 팔릴 정도였습니다. 모네 자신도 놀랄 만한 금액이었습니다. 모네가 타계한 후 1932년 12월 15일 파리에서 있었던 경매에서 모네의 작품 두 점이 십여 만 프랑씩에, <앙티브, 살리 가족 정원의 전망>은 20만5천 프랑에 팔렸습니다.



 

 



모네의 <님페아 Nympheas>, 1915, 유화, 149-200cm.



 

 



모네의 <일본식 다리 Le Pont Japonais>, 1919, 유화, 100-200cm.



 

 



모네의 <님페아 연못, 지베르니 Le Bassin aux Nympheas, Giverny>, 1919, 유화, 100-200cm.

 

어느 한 부분이 주제가 되지 않고 그림 전체가 하나의 주제가 되는 올오버all-0ver 회화양식은 모네의 수련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후 잭슨 폴록에 의해 더욱 양식화되었으며, 새로운 추상 양식으로 확고해집니다.



 

 



모네의 <님페아 Nympheas>, 1919, 유화, 100-200cm.



 

 



모네의 <가지가 늘어진 버드나무 풍경 Paysage, Saule Oleureur>, 1918, 유화, 130-110cm.



 

 



모네의 <아이리스가 있는 길 Les Iris>, 1916-17, 유화, 200-180cm.



 

 



모네의 <자주군자란 Agapanthes>, 1916-17, 유화, 200-180cm.



 

 



모네의 <등나무 Glycines>, 1918-20, 유화, 두쪽 각 패널은 150-200cm.



 

 



모네의 <등나무 Glycines>, 1918-20, 유화, 두쪽 각 패널은 150-200cm.



 

 



모네의 <지베르니의 장미로 울타리를 만든 길 L'Allee de Rosiers a Giverny>, 1920-22, 유화, 89-100cm.



 

 



모네의 <지베르니의 일본식 다리>, 1923년경, 유화, 89-93cm.



 

 



모네의 <지베르니의 일본식 다리>, 1923년경, 유화, 89-93cm.



 

1918년 클레망소가 국무총리 겸 국군 통치권자의 직위에 올랐습니다. 그해 11월 11일 휴전이 선언되었고, 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었습니다. 모네는 클레망소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친애하는 친구, 저는 이제 막 두 점의 장식적 패널을 완성했는데, 승전의 날을 그림에 기록하려고 합니다. 전 선생을 통해 이것들을 국가에 기증하기 바라는데, 승전을 축하하는 의미입니다. 전 이 작품이 장식미술관에 걸리기를 바랍니다.

 

엿새 후 클레망소가 제프루아를 대동하고 지베르니로 왔습니다. 두 사람은 모네가 제안한 패널보다 더 큰 작품을 기증하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들은 화실에 걸려 있는 님페아 시리즈를 기증한다면, 모네가 바라는 대로 그것들을 걸 수 있는 공간을 새로 건축할 용의가 있다면서 이는 프랑스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모네는 클레망소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뮤지엄 설립에 관한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1920년 1월 16일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클레망소 측이 패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모네와 클레망소의 약속은 자연히 무산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모네가 님페아 시리즈를 국가에 기증하겠다는 소문이 나자 일본과 미국에서도 모네를 위한 뮤지엄을 짓고 그것들을 영구소장하겠다고 제의해왔습니다. 모네가 망설일 때 클레망소가 먼젓번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모네가 님페아 시리즈를 국가에 기증하겠다고 약속한 사실과 호텔 비롱에 모네를 위한 뮤지엄이 건립될 것이라는 기사가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는데, 그 호텔은 로댕 뮤지엄으로 개조되었습니다. 언론은 모네가 자신의 집과 화실에 있는 모든 작품을 국가에 기증하기로 선언했으며, 그 조건으로 뮤지엄은 모네가 원하는 대로 건축되어야 한다고 보도했습니다. 그해 가을 짐페가 방문했을 때 모네는 “모든 작품이 내게서 떠나겠지만 정부와 나 사이에 건축물에 대한 충분한 의논이 있은 후에야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설계된 모네 뮤지엄의 정면



 

 



입구로부터 시계방향으로 그림을 걸 수 있게 설계한 전시장



 

1920년 12월 모네로부터 의뢰받은 건축가 루이 보니에가 뮤지엄 설계를 모네와의 협의를 거친 후 정부 담당부서에 제출했습니다. 근래에 발견된 보니에의 설계도를 보면 모네를 기념하는 박물관은 팔각형 천정의 건축물로 호텔 비롱과 마주하는 곳인데, 현재 로댕의 <지옥의 문>이 소장되어 있는 곳입니다. 설계도에 의하면 공간이 하나로 되어 있어 관람자는 한눈에 모네의 수련화들을 관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50만 프랑이 소요되는 보니에의 계획은 정부에 의해 기각되었고, 그때 클레망소는 파리에 없었습니다. 클레망소는 1920년 9월에 극동으로 떠나 이듬해 3월에야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클레망소가 파리에 있었다면 모네를 위한 뮤지엄이 보니에의 계획대로 건립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파리로 돌아온 클레망소는 그동안 있었던 일에 관해 소상히 듣고서 열흘 후 새로운 제안을 모네에게 했습니다. 1921년 클레망소는 오랑제리가 뮤지엄 건립지로 적합한 것 같다는 의견을 서신으로 보내왔습니다.

 

일주일 후 모네는 파리로 가서 클레망소와 함께 오랑제리에 직접 가봤으며 루브르에도 갔습니다. 지베르니로 돌아온 모네는 예술부 장관 레옹에게 뮤지엄 내부는 둥근 공간이면 되겠지만, 자신이 직접 건물을 보기 전까지는 기증서에 서명하지 않을 것임을 통보했습니다. 또한 뮤지엄이 건립되기 전에 자신이 사망할 경우 기증서는 자연히 무효라고 주장했지만 레옹이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해 여름 클레망소와 제프루아가 모네를 다시 방문하여 많은 대화가 오고 간 후 11월 클레망소가 레옹에게 모든 것이 잘 되었음을 알리면서 오히려 기증할 작품의 수가 늘었다고 좋아했습니다. 레옹과 클레망소는 둥근 벽이 있는 공간을 건립한다면 12점이 아니라 18점을 기증하겠다는 모네의 의사를 확인했습니다. 그해 12월 14일 클레망소는 수일 내로 뮤지엄 건립을 위한 예산이 통과될 것임을 모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카미유 르페브르가 1922년 1월 14일 모네에게 제출한 설계도



 

 



오랑제리 무지엄 설계도, 1922년 1월 20일



 

 



카미유 프레브르가 1922년 3월 7일에 제출한 두 번재 설계도



 

 



오랑제리 뮤지엄 설계도, 1927년 5월



 

보니에 대신 루브르 뮤지엄 소속 건축가 카미유 르페브르가 새로 건축할 뮤지엄 설계를 맡았습니다. 르페브르가 1922년 1월 14일 모네에게 설계도를 제출했는데, 모네와 약간의 이견이 있었으므로 몇 차례 의견을 조정했습니다. 르페브르는 1923년 3월 7일 두 번째 설계도를 모네에게 제출했지만, 결국에는 첫 번째 설계도를 약간 수정하여 설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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