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의 재화가 어떤 분배 원칙에 적합한지 결정하는 방법


 

 

 

 

『정의란 무엇인가?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와 『왜 도덕인가? Why Morality』의 저자이며 하버드 대학의 교수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1953)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있지만, 돈으로 사서는 안 되는 것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건 유권자의 표와 신의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투표권을 사고파는 행위는 면죄부의 판매와 마찬가지로 혁명을 불러일으킨다고 경고합니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1935-) 교수는 『정의의 영역』에서 분배 정의에 관한 논쟁에 창의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

이 논쟁의 한편에 자유지상주의자가, 다른 한편에는 평등주의자가 있습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자유교환의 매개체인 돈을 가진 사람이 그것으로 원하는 걸 무엇이든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평등주의자들은 모두가 같은 양의 돈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만 돈의 분배의 공정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응수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는 강자의 입장에서 거래하고 누구는 약자의 입장에서 거래한다고 우려합니다.

따라서 소위 자유시장이란 건 공정해질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평등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모든 부가 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더라도 거래가 시작됨과 동시에 평등은 끝난다고 주장합니다. 운 좋게 혹은 환경의 영향에 의해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거래를 잘할 테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만큼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능력과 욕구가 다른 한 완벽한 평등은 결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왈저는 자유지상주의자와 평등주의자 간의 논쟁 기반을 바꿈으로써 비평가와 옹호자 모두로부터 평등 문제를 구제해냅니다.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돈의 분배보다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제한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데 있습니다. 이는 정의의 영역에 대한 논의에서 핵심이 됩니다. 왈저는 재화마다 나름의 원칙이 지배하는 영역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복지는 궁핍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하고, 명예는 그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정치적 힘은 도덕성을 지닌 사람들에게, 직책은 적임자들에게, 사치품은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능력과 의향이 있는 사람들에게, 신의 은총은 독실한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왈저는 불평등한 부가 요트나 고급 음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하지 않은 영역을 지배하려는 돈의 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봅니다. 돈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사려는 경우처럼 말입니다. 돈은 최악의 위반자이지만, 돈만이 잘못된 지배력을 발휘하는 유일한 도구는 아닙니다. 어떤 자리를 돈이나 능력이 아닌 혈연관계에 의해 획득된다면 그건 족벌주의입니다. 족벌주의와 뇌물이 비난받는 이유는 재화가 나쁜 원칙에 의해 분배되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논의 대부분은 어떤 재화가 정확히 어느 영역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벌어집니다. 예를 들면 보건, 주택, 교육 등이 국가기 국민에게 제공하는 기본권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시장에서 판매되는 상품인지 말하기 어렵습니다. 섹스의 경우 성적 즐거움이 오직 사랑과 헌신에 근거해서만 분배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현금으로 사고팔 수 있는지.

사회복지이든 성생활 관습이든 우리에게는 어떤 재화가 어떤 분배 원칙에 적합한지 결정하는 방법이 필요하며, 가장 친숙한 방법은 자연발생적 보편적 권리를 밝히고 그것을 토대로 어떤 권리가 뒤따를 수 있는지 추론하는 것입니다. 왈저는 권리에 호소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특정 공동체 내의 구성원 자격이라는 개념, 즉 권리를 우선시하는 정치이론에 강력히 도전하는 개념을 채택합니다. 그는 분배 정의가 반드시 그런 구성원 자격과 함께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모두가 권리의 보유자이기 이전에 정치적 공동체의 구성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특정 재화에 대해 권리를 가지느냐 여부가 그 재화가 우리의 공동체 생활에서 수행하는 역할과 중요성에 의존한다는 논리입니다.

왈저는 의료보험에 대한 공공지원 확대 찬성론으로 이 요점을 설명합니다. 치료받을 보편적 권리가 아닌 현대 미국인의 삶과 그것을 정의하는 논증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영혼의 치료가 중세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했던 바와 신체의 치료가 현재의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같다고 주장합니다. 중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원이란 개념이 사회적으로 인정된 가치였습니다. “그에 따라 모든 교구에 교회가 자리하고 정기적인 예배, 젊은 세대를 위한 교리문답, 의무적인 친교가 존재”해야 했던 것입니다.

현대의 우리에게는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욕구입니다. “따라서 모든 구역마다 의사와 병원이 있어야 하고 정기적인 건강검진과 젊은 세대를 위한 건강교육, 의무적인 예방접종 등이 존재”해야 합니다. 의료보험은 이제 사회 내 구성원 자격과 관련된 문제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거기에서 소외시키는 건 위험할 뿐만 아니라 불명예스러운 일종의 파문 선고와 같습니다.

왈저의 개념에서 평등의 문제는 구성원 자격 문제와 결부됩니다. 그의 『정의의 영역』은 우리의 사회적 재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고안된 독특한 예증과 역사적 사례들을 소개하며, 또 다른 문화와 비교함으로써 이해를 돕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의도가 본질적으로 보수적일 뿐만 아니라 비판력이 결여되었다는 논거를 내세우며 이의를 제기합니다. 구성원의 공동 이해에 충실한 사회라고 해서 반드시 공명정대한 사화가 되는 건 아니며, 단지 일관성 있는 사회가 된다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정의의 개념이 어떤 객관적 평가의 힘을 갖는 것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어느 사회와도 관계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정의가 그것이 판단해야 하는 바로 그 가치의 볼모로 남게 됩니다.

샌델은 왈저의 다원주의가 그러한 종류의 도덕적 상대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왈저의 상대주의적 목소리는 도덕적인 힘을 실어주는 보다 확언적인 목소리와 팽팽한 긴장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왈저의 주장에는 공동체에 대한 특별한 비전, 즉 우리가 구성원으로서 공유하는 공동의 가치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왈저가 염두에 둔 그러한 종류의 공동체를 느낄 수 있는 표현 한 가지가 공휴일제도입니다. 휴가는 개인적인 행사로서 책무를 떨쳐내고 일상적인 장소에서 벗어나는 시간인 데 비해 공휴일은 함께 축하하거나 기념하는 공적인 행사입니다. 왈저는 어떤 형태의 휴식이든 풍성한 시민적 삶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의는 공휴일과 휴가 사이에서 어느 편도 들지 않으며, 그저 어떤 형태든 우세한 것에 대한 공공 지원을 요구할 뿐”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이는 공휴일보다 휴가에 가치를 두는 공동체는 충만이 부족할 뿐 아니라 공동체가 그러한 공휴일을 제공하는 데 필요한 소속감을 유지하지 않는다는 설명입니다.

휴가에 의한 공휴일 쇠퇴는 도덕적 유대의 약화를 암시합니다. 샌델은 이것이 왈저의 주장에 단김 큰 힘이라고 말합니다. 정의가 구성원 자격에서 시작되는 사회에선 분배만 염려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구성원 자격을 함양하는 도덕적 상황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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