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와 바다가 어우러진 혼돈의 세계 브르타뉴


모네의 <파라솔을 든 여인 (왼편으로 얼굴을 돌린) Lady with a Parasol (Facing Left)>, 1886, 유화
지베르니의 작은 평원은 계절다라 색채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센 강에 닿아 있는 구릉과 강 언덕의 포플러가 멀리 보이고, 봄의 들판은 햇빛을 흠뻑 받습니다. 빛이 들판에서 속삭이는 가운데 여인이 산보하는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사진: 옥타브 미르보(1850-1917)
모네는 베르테에게 브르타뉴에 꼭 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 소망이 이뤄졌습니다. 그곳에 거주하던 친구 소설가이며 극작가 옥타브 미르보Octave-Henri-Marie Mirbeau의 초대로 1886년 가을 처음으로 브르타뉴를 방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미르보는 친구 로댕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네의 재능을 칭찬했습니다.
모네는 9월부터 11월 말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대서양이 바라보이는 그곳은 문명이 닿지 않은 소박한 원주민들의 고장이었습니다. 브르타뉴는 폴 고갱에게는 제2의 고향과도 같은 곳으로 고갱이 문명의 도시 파리를 버리고 그곳에 안주하기 시작한 건 1886년부터였습니다. 모네가 고갱을 만났다는 기록이 없는 걸 보면 고갱이 그곳으로 간 건 모네가 돌아온 후였던 것 같습니다.
모르비앙 만의 벨일 섬으로 간 모네는 마을의 한 어부 집에 묵으면서 그곳 절경을 40점가량 그렸습니다. 그것들은 연작이 아니라 장소와 일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 풍경화들입니다. 알리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자신이 바라는 작품을 그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바다 장면을 캔버스에 담기 위해선 매일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매순간 같은 곳에서 바다를 관망해야 한다는 걸 난 알고 있소. 그래서 같은 주제를 네 번 혹은 여섯 번 이상 그릴 때도 있구려.”(1886. 10. 30)

모네의 <벨일의 암석 Rocks at Belle-Ile>, 1886, 유화

모네의 <코통 항구의 피라미드, 벨일, 빛의 효과 Les Pyramides de Port-Coton, Velle-Ile, Effet de Soleil>, 1886, 유화, 64-64cm.

모네의 <폭풍: 벨일의 암석 Storm: Rocks at Belle-Ile>, 1886, 유화

모네의 <벨일의 바위 Cote Rocheuse, Rocher du Lion, Belle-Ile>, 1886, 유화, 65.5-81cm.

모네의 <도뫄 항구, q1pf일 Port-Domois, Belle-Ile>, 1886, 유화, 65-81cm.

모네의 <도뫄 항구의 작은 동굴 Grotte de Port-Domois>, 1886, 유화, 65-81cm.

모네의 <벨일의 뾰족한 바위 구조 Pointes de Rochers a Belle-Ile>, 1886, 유화, 81-65cm.

모네의 <벨일의 바위, 도뫄 항구 Rochers a Belle-Ile, Port-Domois>, 1886, 유화, 73-60cm.

모네의 <구파르 항구의 뾰족한 바위 구조 Pointes de Rochers a Port-Goulphar>, 1886, 유화, 81-65cm.

모네의 <거친 연안 La Cote Sauvage>, 1886, 유화, 65-81cm.

모네의 <격렬한 바다 Mer Demontee>, 1886, 유화, 65-81cm.
모네는 <벨일의 암석>을 비롯하여 피라미드처럼 생긴 바위를 같은 장소에서 시각과 일기에 따라 다른 장면으로 묘사했습니다. 훗날 클레망소가 모네를 가리켜 “바다를 그린 유일한 화가”라고 칭찬했는데, 그는 과연 당대의 가장 유명한 바다의 화가였습니다. 그는 바다의 소동, 바위를 에워싼 물결, 파도에 끄떡없는 바위, 바다의 끊임없는 운동을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바람 한가운데에 서서 사나운 일기에도 아랑곳 않고 작업에 열중했습니다. 파도가 일으키는 물보라가 그의 옷을 적시기 예사였습니다. 하늘과 바다와 바위, 대기와 물과 땅이 상접한 광대한 공간을 캔버스에 담아낸다는 건 실로 엄청난 용기와 재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모네가 아니면 자연의 변화무쌍한 장면들을 그려낼 화가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위도 물결도 모네의 율동적인 붓질 속에 포착되었습니다.
모네는 카이유보트에게 그곳에서의 작업에 관해 적었습니다.
“난 지금 웅대한 천연의 현장, 뽀족뾰족한 암석과 놀라운 색채로 뒤덮인 바다가 어우러진 혼돈의 세계에 와 있네. 힘겨운 일이 많이 있지만, 이곳에 완전히 반해버렸네. 여태까지 영국 해협 정도나 그리면서 진부한 작업에 만족해왔으니 이 대양이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서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되네.”(1886. 10. 11)
벨일에서 만난 귀스타브 제프루아Gustav Geffroy(1855-1926)는 조르주 클레망소의 진보주의 신문 『정의』에서 근무하는 미술평론가로 모네의 절친한 친구이자 열렬한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제프루아는 1924년 『클로드 모네』에서 격렬한 태풍 속에서 이젤을 절벽에 묶어두고 작업하던 모네의 모습을 회고했습니다.
“모네는 이젤을 노끈과 돌덩어리로 고정시켜 놓은 채 비바람 가운데서도 작업했다. ... 그는 거품으로 뿜는 물살이 자갈밭 암석을 지나 ... 요동치는 물살 한가운데 어둠의 세계를 이루는 암석 언덕에 부딪히는 광경을 관망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것은 사나우면서도 무한히 구슬픈 장관이었다.”
집으로 돌아오기 며칠 전 뒤랑-뤼엘에게 보낸 편지에 모네는 “제가 생각하기에 완성된 그림은 없습니다, 선생도 알다시피 늘 그랬던 것처럼 그림을 화실에서 점검하면서 마지막 붓질을 가하기 전까지는 완성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그는 39점의 그림을 갖고 11월에 귀가했습니다.1886년 에드가 드가가 제8회 인상주의 그룹전을 개최했는데, 모네와 르누아르는 참가를 거부했습니다. 고갱과 세잔이 참가한 이 전시회는 실패로 인상주의 화가들은 더 이상 그룹전을 개최하지 않기로 의견을 모으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 전시에서는 신인상주의 예술가들 조르주 쇠라와 폴 시냐크의 작품이 관람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붓놀림이 자꾸 짧아지더니 결국 쇠라에 이르러 아예 점으로까지 쪼개지고 말았습니다. 쇠라의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가 평론가들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스물일곱 살의 쇠라는 이 작품으로 화제의 예술가로 사람들의 입에 올랐습니다. 이제 신인상주의가 미술계의 주류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