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의 자연주의 회화



 

 

 

 

마네는 야외로 나가 풍경을 그리기도 했지만, 모네와는 달리 실내에서 모델을 그리는 데 더 익숙해 있었습니다. 자연에 대한 그의 견해는 모네와는 사뭇 달랐는데 젊은 화가들에게 한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기억을 풍부하게 하게. 자연이 주는 것이란 정보뿐일세. 기억을 놓치는 순간 진부한 자연으로 떨어지게 된다네. 늘 주인이 되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도록 하게. 그림은 지겨운 과제가 아니니까.

 

마네가 야외로 나가 그리기를 꺼려한 또 다른 이유는 왼쪽 다리에 마비증상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 증세를 안 건 1876년 오슈드 가족과 함께 지낼 때였습니다. 처음에는 류머티즘인 줄로만 알았는데, 당시 사람들은 임질과 관절염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마네의 주치의도 관절염으로 오진했습니다. 2년 후에는 매독 3기의 증세인 이동성 운동실조로 인해 마비증세가 더욱 심해졌고, 오른쪽 다리를 굽히지 못할 정도로 악화되었습니다.



 

 



마네의 <나나 Nana>, 1877, 유화, 150-116cm.

 

마네가 이 작품을 장식품, 그림, 부채 등을 파는 카푸친 가의 상점에 진열하자 많은 사람들이 보려고 몰려들었습니다. 부르주아 생활의 이면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속옷차림의 여인이 거울 앞에서 루즈를 바르고 있습니다. 야회복을 차려입은 신사는 여인이 화장을 끈나기만 기다리며 앉아 있습니다. 신사의 기다림에 위축된 여인의 모습과 허황된 신사의 모습이 대조됩니다. 배경에는 일본 벽화에서 볼 수 있는 물가는 거니는 학의 모습이 있습니다. 모델 앙리에트 오제는 당시 오렌지 공의 애인이었으며, 그녀는 ‘시드론(레몬’으로 불리었습니다.



 

에밀 졸라의 소설 『나나』가 출간되기 전 1877년에 마네가 먼저 <나나>를 그렸습니다. 졸라는 『나나』를 1879년 10월부터 『르 볼테르 Le Voltaire』에 연재하다가 1880년 2월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졸라와 마네의 관계를 알고 있던 유이스망은 “마네는 졸라가 소설에서 보여주려고 한 여인을 잘 묘사했다”면서 마네의 <나나>는 졸라가 『나나』를 쓰는 데 직접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마네는 훗날 소설 『나나』를 읽고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라고 졸라에게 말했습니다. 졸라는 소설에서 나나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속옷을 겨우 걸친 그녀는 아침 내내 서랍장 위에 있는 조그만 거울 앞에 붙박인 듯 서 있다. … 여전히 아이 같기도 하고 성숙한 여인 같기도 한 자신의 벌거벗은 몸, 그 싱싱한 젊음을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

 

<나나>는 1877년 국전에 낙선했는데 무도회에서 볼 수 있는 여인의 전신상이 진부한 작품으로 보였고, 그림의 모델이 화류계에서 익히 알려진 배우 앙리에트 오제였으므로 살롱 심사위원들로서는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마네의 <스케이팅 Skating>, 1877, 유화

 

마네가 자주 가던 스케이트장에서 현대인 생활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모델은 <나나>에서 포즈를 취했던 앙리에트 오제입니다. 그녀의 뒤 오른쪽의 여인은 그녀의 자매 빅토리아느로 밤의 환락세계에서 오제와 인기를 다투었습니다. 이 그림에서 오제의 정력적이면서 우아한 모습이 잘 묘사되었습니다.



마네는 앙리에트 오제를 모델로 <스케이팅>도 그렸는데, 샹젤리제에 새로 문을 연 스케이트장을 찾은 우아하고 풍만한 여인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이 작품과 <자두> 그리고 <나나>는 자연주의 주제의 그림들이었습니다.



 

 



마네의 <햄릿 역의 포르 Portrait de Faure Dans Hamlet>, 1877, 유화, 196-130cm.

 

장 밥티스트 포르는 오페라가 시작된 1868년부터 햄릿 역할을 맡았으며, 한 시즌에 무려 58번이나 무대에서 같은 노래를 불렀고, 유명해졌습니다. 그는 재능 있는 바리톤 가수였으며, 1865년에 베르디가 인정해준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마네는 덴마크의 왕자로 분장한 포르를 1876년 말부터 그리기 시작하면서 어던 포즈로 그릴 것인가에 대해 의논했습니다. 포르는 셰익스피어의 주인공 모습으로 그려주기를 원했으며, 마네는 무대에 선 그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평론가들은 1877년 살롱을 통해 소개된 <햄릿 역의 포르>를 가소로운 초상화라고 비난했습니다. 작자미상의 이 캐리커처에는 ‘마네가 오그라뜨린 포르’란 간단한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사진: 오페라 가수이면서 마네의 작품 수집가인 장 밥티스트 포르



 

<나나>를 그린 후 마네는 앙브루와즈 토마의 오페라에서 햄릿 역을 맡은 가수 장 밥티스트 포르의 초상을 그렸습니다. ‘바리톤의 왕’이란 찬사를 들은 포르는 한 해 전에 마네에게 초상화를 의뢰했는데 <나나>를 그린 후에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마네는 1막 4장에서 슬퍼하는 햄릿 앞에 아버지의 유령이 나타나는 장면을 선택하여 10년 전에 그린 적이 있는 스페인풍의 검정색으로 강렬함을 표현했습니다. 무대 위에 있는 모습이라서 조명에 의한 명암을 강조한 것입니다. 포르가 스무 번이나 그의 화실로 와서 포즈를 취한 데서 그의 초상을 그리기 쉽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훗날 포르는 술회했습니다.

 

내가 포즈를 취한 것이 스무 차례는 될 것이다. 나는 노래를 부르러 가야 했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 내가 보니 초상화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조명이 깜박거리는 신비로운 분위기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림의 다리는 내 다리가 아니었다. ‘이것은 내 다리가 아니잖습니까?’ 절반밖에 닮지 않은 나의 초상화를 보고 놀라서 항의하니, 그는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당신보다 훨씬 멋진 다리를 가진 인물로 그린 것이 잘못되었단 말이오?’라고 오히려 핀잔했다. 그 후 우리는 몇 차례에 걸쳐서 티격태격하는 서신을 주고받았고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햄릿 역의 포르>가 1877년 5월 1일 개막된 살롱에 소개되었을 때 어느 평론가는 “고집쟁이들의 두목 마네는 가수들의 두목을 그리고 싶어 했지만 이 초상화는 그야말로 가소롭기만 하다”고 적었고, 풍자화가 샹은 캐리커처에다 “햄릿이 미쳐서 마네에게 자기의 초상을 그리게 했다. … 그래서 올챙이의 초상이 되고 말았다”고 적었습니다. 포르의 다리를 보고 어떤 평론가는 마네가 다른 사람의 다리로 대체했다고 적었습니다. 마네는 친구 토세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내가 그린 <햄릿 역의 포르>를 두고서 충분히 비꼬았을까? 더구나 그들은 왼쪽 다리가 너무 짧다고 말하네. 사람이 앞으로 걸어갈 때 두 다리가 육군이 차렷하고 선 것처럼 되겠는가? 더구나 경사진 바닥에서? 빌어먹을! 난 정말이지 모범적인 드로잉 선생이 관람자에게 달려가는 햄릿의 환상을 어떻게 그릴 것인지 알고 싶다네.

 

마네는 말년에 새 모델을 선정했는데 댄서 출신의 메리 로랑이었습니다. 로랑은 씀씀이가 크고 사치스러웠지만 화가와 작가들을 좋아했으며, 말라르메를 특히 좋아했습니다. 로랑이 기꺼이 모델이 되어주겠다고 하자 마네는 의욕이 생겼습니다. 로랑의 건강 넘치는 활기찬 매력을 하나씩 드러내는 작업은 마네에게도 흥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로랑도 마네를 본 순간 그를 좋아했고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습니다.



 

 



마네의 <가슴을 드러낸 금발 Blonde with Bare Breasts>, 1878년경, 유화, 62.5-51,cm.

 

마네는 주로 초상화를 그렸지만 이 작품처럼 모델의 얼굴을 불분명하게 그린 적은 없었습니다. 모델의 머리카락, 드러난 가슴과 걸친 옷자락에 나타난 붓자국은 표현적이고, 전보다 단순한 방법이며, 이차원적으로 매우 평편해졌습니다. 모델은 붉은 양귀비꽃이 달린 밀짚모자를 썼는데, 양귀비꽃은 녹색 배경과 대조되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모델의 피부색이 매우 아아하게 나타났으며, 진주 같은 광채가 밝은 녹색의 배경에 잘 조화됩니다. 마네는 공기와도 같은 가벼운 붓터치를 여기저기에 가했습니다.



 

 



마네의 <목욕통에 있는 메리로랑 In the Tub, Mery Laurent>, 1878, 종이에 파스텔, 55-45cm.



 

 



마네의 <가을: 메리 로랑 L'Automne: Mery Laurent>, 1881, 유화, 73-51cm.

마네는 1881년 네 명의 미인들을 소재로 사계절을 그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봄과 가을밖에 그리지 못했는데, 젊은 여배우 잔 드 마르시를 모델로 <봄: 잔>을, 메리 로랑을 모댈로 <가을: 메리 로랑>을 그렸습니다. 꽃이 있는 벽지를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메리를 묘사했는데, 행복과 풍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사진: 1849년 낸시의 앤 로즈에서 태어난 로랑은 십대 때에 파리로 왔습니다. 카바레에서 댄서로 출발한 그녀는 재능이 있어 곧 오페라 무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1878년 로랑을 모델로 <가슴을 드러낸 금발>을 그릴 때에는 이미 다리에 통증이 있었던 터라 유채물감을 수채물감 사용하듯 엷게 타서 빠르게 그리면서 작은 크기로 그렸습니다. 배경을 몇 차례 동일한 색으로 걸쳐 칠한 것으로 봐서 단번에 그렸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같은 해 <목욕통에 있는 메리로랑>을 그렸으며, 1881년에는 <가을: 메리 로랑>이란 제목으로 그녀의 옆모습을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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