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의 <카미유의 임종>



 

 

 

 

카미유는 건강이 악화되어 제대로 거동하지도 못했습니다. 알리스가 사경을 헤매는 카미유를 간호했고, 오슈드는 사업의 재기를 위해 주로 파리에서 지냈습니다. 카미유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다 1879년 9월 5일에 서른두 살의 나이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카미유가 세상을 떠나던 날 모네가 드 벨리오에게 보낸 편지는 카미유에 대한 그의 애정을 말해줍니다.

 

가엾은 아내가 오늘 세상을 떠났습니다. … 불쌍한 아이들과 홀로 남은 저 자신을 발견하고 완전히 낙담한 상태입니다. 당신에게 또 하나 부탁드릴 일은 동봉하는 돈으로 일전에 제가 몽 드 피에테에 저당잡힌 메달을 찾아달라는 것입니다. 그 메달은 카미유가 지녔던 것 중에 유일하게 기념될 만한 것이라서 그녀가 떠나기 전에 목에 걸어주고 싶습니다.”(1879. 9. 5)



 

 



모네의 <카미유의 임종 Camille on Her Death-Bed>, 1879, 유화



<카미유의 임종>은 모네가 카미유의 시신을 그린 것입니다. 모네가 본능적으로 그린 그림은 습작에 불과했습니다. 아내의 시신을 그렸다는 소문은 널리 퍼졌습니다. 이때 모네가 한 말을 1928년에 클레망소가 전했습니다.

 

여전히 제게 다정한 여인의 임종을 보면서 저는 죽음이 그녀를 부동의 모습으로 만드는 데 대한 색의 변화를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어 그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피사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카미유를 잃고 방황하는 모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극도의 비탄에 빠졌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득하기만 합니다. 비통함이 뼈에 사무칠 정도입니다.”(1879. 9. 26)



 

 



모네의 <국화 Chrsanthemums>, 1878, 유화

 

아르장퇴유에서 모네는 오로지 센 강을 배경으로 그리는 데만 집중했습니다. 꽃을 그릴 경우에도 정원이나 들에 핀 꽃을 그렸습니다. 르누아르가 꽃이 있는 정물을 많이 그리자 자극을 받아 그도 꽃이 있는 정물을 그렸습니다. 그는 1876-82년에 화병에 꽂힌 꽃을 주로 그렸으며, 정물화를 인상주의전에 출품하기도 했습니다. 이 그림 속의 국화는 곧 시들 것만 같습니다. 생생한 꽃이 아니고 시들어가는 꽃이라서 시듦의 가엾음을 묘사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자연에는 나고 지는 갖가지가 있으므로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리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국화는 벽지의 붉은색 꽃다발과 대조를 이룹니다. 붉은색 화병과 붉은색 바닥으로 인해 늦가을의 정취가 국화에 배어 있는 듯합니다.



 

 



모네의 <배와 포도 Pears and Grapes>, 1880, 유화

 

모네는 1870년 이전에 르누아르와 나란히 꽃을 그린 적이 있습니다. 그 후 주로 물을 그리다가 1878년부터 다시 정물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폴 세잔처럼 공간에 다한 관심에서 정물을 모티프로 삼은 것이 아니라 물 다음으로 이차적인 관심을 갖고 그렸습니다.



 

 



모네의 <해바라기 Bouquet de Soleils>, 1880, 유화, 101-81.3cm.

<국화>에 비해 해바라기는 꿈틀대고 생기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모네의 <복숭아 단지 Bocal de Peches>, 1866, 유화, 55.5-46cm.



 

모네와 알리스 그리고 아이들이 퇴거당할 지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모네는 풍경화보다 더 비싼 가격에 팔리는 정물화를 그렸습니다. 그는 1866년에도 정물화를 그린 적이 있지만 주로 야외로 나가 작업하느라고 소홀히 했다가 카미유가 죽은 후 집에만 있다 보니 다시 그리게 되었고, 그 후 틈만 나면 그렸습니다. 그는 해바라기, 달리아, 글라디올러스, 과꽃, 국화, 튤립 등을 그렸습니다.



 

 



모네의 <부빙, 베퇴이유 The Thaw, Vetheuil>, 1880, 유화

 

아내를 잃고 처음 맞는 겨울은 모네를 더 춥고 허전하게 했습니다. 카미유의 임종을 그린 후라서 죽은 그녀의 차가운 회색 얼굴이 늘 마음속에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회색이 두드러진 부빙 혹은 해빙의 장면들은 그의 마음을 나타낸 것만 같습니다. 침통한 분위기가 확연한 풍경들입니다. 회색과 흰색으로 망망한 베퇴이유에 얼음조각들이 떠 있고, 신비한 정숙함이 느껴지는 풍경에 엷은 태양빛이 광채를 냅니다.



 

 



모네의 <베퇴이유 해빙 Ice Breaking-Up at Vetheuil>, 1880, 유화



 

 



모네의 <센 강둑, 베퇴이유 Au Bord de la Seine, pres de Vetheuil>, 1880, 유화, 73-100cm.



 

1879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1880년 1월 모네는 센 강의 정경을 캔버스에 담기 위해 야외로 나갔습니다. 강 위에는 얼음이 둥둥 떠다녔습니다. 그는 강가의 얼음에 구멍을 내고 이젤을 세운 후 병에 담아 온 뜨거운 물로 언 손을 녹여가며 빛에 따라 변화를 일으키는 강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장님이 막 눈을 뜨게 되었을 때 바라볼 수 있는 장면을 그리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각적 관찰을 신뢰했으며, 자신이 관망한 세계가 실재 세계라고 믿었습니다. 이젤의 위치를 옮기지 않거나 조금만 옮겨 동일한 주제를 보는 시간에 따라서 그리고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는 정경을 대여섯 점 그렸습니다. <부빙, 베퇴이유>와 <베퇴이유의 해빙>이란 제목으로는 두 점 그렸는데, 강물에 떠내려가는 얼음덩이들을 그리기 위해서는 신속한 관망이 요구되었습니다. 봄이 되고 꽃들이 만개하자 <센 강둑, 베퇴이유>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모네의 <라바쿠르의 센 강 The Seine at Lavacourt>, 1880, 유화, 100-150cm.

붓질을 짧게 해서 순간적인 빛의 역할을 나타내기보다는 수면을 매끄럽게 해서 부르주아들이 좋아하는 그림이 되게 했습니다.



 

모네는 독립화가들에게 살롱에 출품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지만, 1880년 살롱에 <얼음덩이>와 <라바쿠르의 센 강>을 출품했고, <라바쿠르의 센 강>만 받아들여졌습니다. 1년 전부터 자칭 ‘독립화가 Independent Artists’라고 칭한 무명협동협회 화가들이 제5회 인상주의전을 열었는데, 모네는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살롱에 복귀한 것입니다. 살롱 출품에 대한 비난을 의식한 모네는 뒤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작품을 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부르주아적인 작품을 그리게 되었다고 변명했습니다. 에콜 데 보자르의 학장 쉔느비에르는 살롱에서 창백한 색조에 영롱한 빛이 있는 모네의 작품을 보고 감동했으며, 다른 화가의 작품들은 아주 어둡게 보이더라고 했습니다. 에밀 졸라는 <라바쿠르의 센 강>에 대해 경솔한 방법으로 그려졌다고 했지만, 1880년 6월 21일 『르 볼테르』에 발표한 글은 모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십 년 안에 모네의 재능이 제대로 평가될 것이며 호평 속에서 그의 작품들이 전시될 것이다. 그의 작품이 고가에 팔릴 것이며 당대의 큰 인물의 위치를 점하게 될 것이다.

 

르누아르가 1879년 살롱에 출품했고, 시슬레와 세잔이 협회를 탈퇴하는 등 무명협동협회는 붕괴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살롱 폐막 후 모네는 ‘현대인의 삶’에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이 화랑은 인상주의 화가들을 후원해온 조르주 샤르팡티에가 1879년에 창간한 잡지 『현대인의 삶 La Vie Moderne』의 건물 부속 화랑입니다. 모네는 18점을 소개했고, <부빙, 베퇴이유>를 샤르팡티에의 아내가 1천 5백 프랑에 구입했습니다. 작품을 판 돈으로 모네는 빚을 갚을 수 있었고, 새로운 의욕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모네는 카탈로그 서문을 써준 뒤레에게 감사의 표시로 그림 한 점을 줬습니다.



 

 



모네의 <산책자 The Stroller>, 1887, 유화, 100-70cm.

산책하는 사람은 모네의 두 번째 아내 알리스입니다. 모내는 이 작품을 1899년 조르주 프티의 화랑에서 열린 로댕과의 2인전 때에 선보였습니다.



 

모네가 ‘현대인의 삶’에서 가진 개인전은 작은 화랑들도 좋은 전시회를 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카페에도 이런 가능성이 있음을 깨닫게 되어 전시회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뒤랑-뤼엘과 조르주 프티가 국내외에서 전시회를 통해 미술시장의 영역을 넓히려고 애썼으며, 뒤랑-뤼엘은 모네의 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뒤랑-뤼엘의 경쟁자 프티는 센 강을 주제로 그린 모네의 그림을 많이 구입했습니다. 모네가 살롱에 참가한 것도 살롱에 당선해서 컬렉터들로 하여금 그의 작품에 더욱 투자하게 만들라고 한 프티의 권유 때문이었습니다. 모네는 프티에게 자신의 작품 두 점은 쉽게 살롱에 입선될 것이라면서 이해하기가 수월해 부르주아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이라고 응답했습니다. 그해 8월에는 르아브르에서 열린 화가동지회의 그룹전에 참여했지만. 살롱 당선작을 포함한 새로운 작품들이 푸대접을 받았습니다. 샤르팡티에는 이듬해 6월 모네의 개인전을 다시 열어주었습니다.

이 시기에 모네의 식구와 오슈드의 식구는 한데 얽혀 뒤죽박죽되어 있었습니다. 오슈드는 사업상 주로 파리에서 지내면서, 알리스에게 파리로 와서 함께 지내자고 했지만 알리스는 모네의 아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구실로 모네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모네의 가정에서 알리스의 역할이 커지면서 모네의 생활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좀 더 작품을 팔아서 새로 꾸미는 가정을 경제적으로 안정시켜야 하고, 또한 나이가 이제 마흔이므로 회화에서도 안정을 찾아야 했습니다.



 

 



모네의 <벼랑에서 본 바다 풍경 La Mer-Vue des Falaises>, 1881, 유화, 60-75cm.



 

 



모네의 <페캉의 해안 Fecamp, Bord de la Mer>, 1881, 유화, 67-80cm.



1880년 여름 모네는 루앙에 있는 형의 별장에서 지내면서 바다풍경과 가파른 언덕을 그렸습니다. 이듬해 3월에는 페캉으로 가서 여러 점 그렸습니다.



 

 



르누아르의 <폴 뒤랑-뤼엘의 초상 Portrait of Paul Durand-Ruel>, 1910, 유화, 65-54cm.



 

작품이 팔리기 시작하자 모네는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서 좀 더 나은 환경으로 이사하기를 원했습니다. 졸라에게 쓴 편지에서 “이제 베퇴이유를 떠나야 할 것 같아 센 강변에 위치한 멋진 곳을 물색 중인데 푸아시가 어떨까 생각 중입니다”(1881. 5. 24)라고 했고, 그해 12월에 이사했는데 이사비용을 뒤랑-뤼엘이 지불했습니다. 그는 베퇴이유에서 동쪽으로 32km 가량 떨어진 푸아시의 생루이 별장으로 이주했으며, 알리스가 아이들을 데리고 그를 따라왔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함께 있자는 간곡한 청을 물리치고 모네를 따라온 것입니다.

뒤랑-뤼엘은 1881년 2월부터 모네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네는 옛 컬렉터들에게 헐값에 팔지 않고 뒤랑-뤼엘에게 팔았습니다. 모네는 경제적으로 넉넉해지자 살롱을 포기할 수 있었고, 인상주의 화가들과도 다시 화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