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은 괴로움에 대한 자연적인 반응이다
우리의 뇌는 부정적인 정보를 긍정적인 것보다 더 빨리 감지합니다. 인간과 같은 사회적 동물에게 있어 위협이나 기회를 알리는 일차적 신호인 표정을 보면, 공포의 표정은 행복이나 중립적 감정을 나타내는 표정보다 훨씬 더 빠르게 인식되는데, 이는 편도체에 의한 빠른 인식 때문으로 보입니다. 연구 결과 뇌는 부정적 신호에 이끌립니다. 편도체는 측뇌실 하각의 전단에 있는 대뇌핵의 하나로 편도를 닮은 점에서 이런 명칭이 붙여졌습니다.
비록 부정적인 경험을 잊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뇌에는 지워지지 않는 자국이 남습니다. 이들 잔재들은 남아 있다가 이전의 기억과 유사한 두려운 사건에 마주치면 즉시 다시 점화할 준비를 합니다.
부정적 기억은 우리를 염세주의자로 만들고, 과잉반응을 하게하며 점점 더 부정적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우리의 뇌에는 부정적 경향이 원초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회피 태세가 되어 있습니다. 부정적 경향은 다양한 방법으로 괴로움을 야기합니다. 먼저 항상 일정 수준의 불쾌한 긴장 상태를 일으키는데, 어떤 이들에게는 상당히 강한 수준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자기 성찰이나 명상 수련 등의 내적 주의집중은 긴장 상태에서는 어려워지는데, 이는 뇌가 항상 주변을 살펴서 문제가 없는지를 확인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부정적 경향은 여타 불쾌한 감정들, 즉 분노, 슬픔, 우울, 죄책감, 수치심 등을 더욱 강화시킵니다. 지나간 상실과 실패를 강조하고, 현재의 가능성을 폄하하며, 미래의 장애를 과장합니다. 그 결과 마음은 계속해서 사람의 성격, 행동, 가능성에 대해 부당한 평가를 내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판단의 무게 때문에 우리는 약화되고 지쳐 떨어집니다.
불교에서는 괴로움을 갈망이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근본적인 세 가지 번뇌인 탐욕貪慾, 진에瞋恚(화냄), 우치愚癡(어리석고 못남) 삼독三毒(탐진치)을 통해 나타난 결과로 봅니다. 삼독은 넓은 범위와 사고, 그리고 말, 행동, 특히 스쳐 지나가는 숨은 것들을 모두 포괄하는 강력하고 전통적인 개념입니다. 탐貪이 당근을 움켜쥐려는 것이라면, 진瞋은 채찍에 반발하는 것입니다. 양자 모두 더 큰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 한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치癡는 사물의 객관적인 실재를 파악함에 있어 무지한 것입니다. 예컨대 사물의 연관과 변화가 실제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 등입니다.
『붓다 브레인Buddha's Brain』의 저자 릭 핸슨과 리처드 멘디우스는 때로 삼독이 뚜렷하게 드러나지만 대개는 우리의 의식 기저에서 조용히 작동하고 회로를 조정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의 뇌가 내적 경험과 외부 세계 모두를 묘사할 수 있는 방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이를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시각에는 좌우 모두 맹점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시각적 구멍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뇌는 맹점의 결여된 정보를 보충하여 시각을 완성하는데 이는 포토샵으로 이미지를 보정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외부에 실재한다고 보고 있는 것의 대부분이 실은 우리 뇌 속에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그려낸 영화 장면처럼 처리된 정보입니다. 후두엽으로 보내진 정보 중 극히 일부만이 직접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시각정보입니다. 나머지는 뇌 내부의 기억 저장고와 인지-처리 모듈에서 오는 정보입니다. 우리의 뇌는 세계를 시뮬레이션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실재와 매우 유사한 가상현실인 셈입니다.
릭 핸슨과 리처드 멘디우스는 전전두엽의 위쪽 가운데에 위치한 시뮬레이션 장치 내부에서는 짧은 영화가 계속 상영되며, 이러한 작은 영화 조각들이 우리의 의식적 정신활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합니다. 300여 만 년에 걸쳐 뇌는 그 크기가 세 배로 증가했는데, 그 대부분은 시뮬레이션이 가능한 영역으로, 이는 생존에 시뮬레이션 능력이 매우 크게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시뮬레이션 장치가 상영하는 단편 영화들은 제한된 믿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게다가 고통스러운 감정에 집착하여 실제로는 일어나지도 않거나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고통을 과장합니다. 그리고 이 시뮬레이션 장치는 매 순간, 매일, 우리의 꿈속에서까지도 신경 구조를 형성하여 괴로움을 더해 갑니다.
우리 모두는 때로 괴로워하며, 많은 이들은 크나큰 괴로움 속에 살아갑니다. 연민은 괴로움에 대한 자연적인 반응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도 포함됩니다. 자기 연민은 자실을 불쌍하게 여겨 동정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자기 연민은 순수한 온정, 배려, 그리고 선의로 타인에 대한 연민과 근본적으로 흡사합니다. 자기 연민은 자긍심보다 더 정서적이므로 어려운 상황의 영향력을 줄이고, 자기평가를 유지하며, 괴로움에서 회복하는 데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자기 연민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스스로의 괴로움에 마음을 닫고 있는 사람이 타인의 괴로움을 받아들이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일상 속의 괴로움에 더해 깨달음의 길로 가는 과정 중에 부딪히는 어려운 경험들도 연민의 대상이 되어 마땅합니다. 더욱 행복하고 현명하며 사랑에 넘치는 존재가 되기 위해 우리는, 신경계 내의 오래된 본능에 거슬러가야 합니다. 때로 계, 정, 혜 삼학三學 수련은 자연스럽지 않은데, 계는 효과적으로 작동하던 정서적 반응을 제한하며, 정은 외부에 대한 경계를 감소시킵니다. 또한 혜는 한때 우리의 생존을 돕던 믿음들을 단절시킵니다.
삼학은 괴로움의 원인을 끊기 위해, 모든 것 속에서 하나를 느끼기 위해, 변화하는 순간들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그리고 쾌와 불쾌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게 하기 위해 진화적 틀에 역행하곤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삼학을 중단해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무엇을 거스르고 있으며 어떤 자기 연민을 가져야 하는가를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