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의 <다윗>: 고대의 재탄생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1501년 피렌체로 돌아왔습니다. 피렌체 대성당 작업장에는 ‘거인’으로 불리는 매우 커다란 대리석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약 40년 전 르네상스 조각가 아고스티노 델 두치오에 의해 채석되었지만, 작업장에 방치되고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에게 조각가로서 명성을 날릴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피렌체의 지도자 피에트로 소데리니는 이 대리석으로 <다윗>을 제작하게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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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다윗>, 1501-04, 대리석, 높이 410cm.
로마에 5년 동안 체류하면서 기술을 연마해온 미켈란젤로는 <바쿠스>와 <로마 피에타>로 자신의 위상을 로마에 알렸습니다. 이제 그는 고향을 위해 걸작을 제작하고 싶었습니다. <다윗>은 그동안 로마에서 익힌 솜씨를 시험하는 의미를 지니는 작품이자 그가 대가의 반열이 올랐음을 시위하기에 적당한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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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텔로의 <다윗>, 1450년대, 청동, 높이 15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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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다윗>, 1473-75년경, 청동, 높이 126cm.
도나텔로와 베로키오의 <다윗>은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이지만, 다윗이 적장의 목을 베었다는 기록이 없어 성서적 묘사가 아닙니다. 이와 달리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면 물리적 혹은 심리적으로 곧 행동할 듯한 자세로 돌팔매로 적장을 쓰러뜨린 성서와도 일치합니다. 신앙의 힘으로 우뚝 선 채로 “주는 나의 빛이시고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혹은 “주는 나의 바위가 되시고 요새가 되시나이다” 하는 자신만만한 태도입니다. 또한 이 작품은 누드 남자의 고대 이상형을 알고 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미켈란젤로는 <다윗>을 4m가 넘는 거대한 크기로 제작했습니다. 고대 조각가가 이런 거대한 대리석을 깎아 제작할 때는 보통 신의 형상을 만들었지만, 미켈란젤로는 성서의 인물 다윗의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르네상스를 고대의 ‘재탄생’이라고 말할 때 미켈란젤로의 <다윗>보다 더 함축적으로 그 의미를 시위하는 조각은 없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대리석으로 <다윗>을 제작하기 시작한 건 1501년 9월 13일 월요일부터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1502년 2월 28일 절반가량 제작되었으며, 1504년 1월 25일에는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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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다윗>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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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다윗>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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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다윗>의 부분
<다윗>은 아름답고 젊은 승리자의 상으로 나타났습니다. 도나텔로도 다윗을 강한 소년의 모습으로 형상화했고 취향은 전혀 다르지만 베로키오 역시 다윗을 날씬하고 섬세한 감성을 지닌 소년의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장난기를 다 벗지 못한 덩치만 큰 소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자도 아닌, 몸은 아직도 성장하는 중이고 부드러운 팔다리는 거대한 손발과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그런 나이의 청년을 묘사했습니다. 비례가 잘 맞지 않는 모습을 거대한 크기로 확대했지만, 동작의 기묘한 리듬이 있고 다리 사이로는 큰 삼각형이 생겼습니다. 그는 굳이 아름다운 선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지만 모든 세부의 선들이 놀랄 만큼 아름답고 전체적으로 신체의 탄력을 표현해냈기에 거듭 놀라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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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다윗>의 부분
미켈란젤로는 다윗이 왼발을 옆으로 살짝 벌리면서 몸의 중량을 오른쪽 다리에 지탱하게 했습니다. 왼발은 약간 앞으로 내민 채 발가락으로 바닥을 살짝 누르는 자세입니다. 이 발동작에서 다윗에게 내재하는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깊게 주름진 이마, /쑥 들어간 눈, 길게 E고바로 선 코, 돌출한 입술 이런 것들이 얼굴에 긴장감을 나타내며 뚫어지게 응시하는 눈, 두터운 목, 돌출한 목의 근육, 몸통, 팔에서 상상할 수 없는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머리는 반비례적으로 크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축소감으로 비례적으로 보입니다. 다윗은 왼손을 올려 늘어진 투석기 한쪽 끝을 쥐고 있습니다. 돌을 쥐고 컵 모양을 한 오른손은 반비례적으로 크며, 투석기의 다른 한쪽 끝을 쥐고 있습니다. <바쿠스>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도 관람자가 주위를 돌며 감상하게 만듭니다.
성서에는 어린 다윗은 사울 왕의 무기를 들기에는 체구가 너무 작은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미켈란젤로는 다윗을 거인으로 제작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완전한 누드로 묘사해 놀라움을 가중시켰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다윗>을 거구인 골리앗을 살해하고 나라를 구한 미래의 왕으로 묘사하면서 그의 신앙과 용기를 엄청난 정도로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작품의 내용은 예술가만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재창조되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당시 프랑스의 압력으로 피렌체로부터 독립한 피사를 탈환하기 위해 파병했던 피렌체 시민들에게 역경을 이겨내는 힘과 용기를 고취시키기에 충분했으며, 자긍심을 심어주었습니다. 바사리는 극찬했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조각은 고대의 것이든 모던의 것이든, 그리스인의 것이든 로마인의 것이든 간에 모든 조각을 퇴색시켰다. … 분명한 것은 미켈란젤로의 <다윗>을 본 사람이라면 생존하거나 죽은 조각가가 제작한 어떤 조각이라도 볼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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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청동과 대리석 다윗을 위한 드로잉>, 1501-02, 26.5-18.7cm.
피렌체 지방자치회는 미켈란젤로가 피렌체의 도덕적 힘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고 호평하면서 <다윗>을 청동으로 제작할 것을 의뢰했습니다. 당시 샤를 8세의 총애를 받던 피에르 드 로앙 장군에게 프랑스와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적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방자치회는 1502년 8월 12일 청동 <다윗>을 높이 1.5m 되게 제작하라고 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서둘러 제작하지 않았습니다. 청동 조각가이자 주물공인 베네데토 다 로베차노가 최종적으로 청동으로 뜬 건 1508년으로 미켈란젤로가 로마로 떠난 지 수년 후였습니다. 이후 이 작품은 장군이 아닌 프랑스 재무상 플로리묑 로베르테에게 선물로 주기로 했으나 17세기 이후 그 기록이나 자취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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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베키오 궁전 앞에 있는 <다윗>의 복제품, 대리석, 높이 410cm.
<다윗>이 제작되었을 때 이 조각의 위치를 놓고 피렌체 시민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란이 일어났고, 피렌체 시는 예술가들의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때 레오나르도를 포함하여 페루지노, 보티첼리, 필리포 리피, 일 크로나카, 안드레아 델라 로비아, 그리고 그 외의 유명한 예술가들은 <다윗>이 풍상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하기 때문에 로지아 데이 란지 내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미켈란젤로는 시뇨리아(시청) 바깥 광장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조각은 1504년 5월 14일에서 18일 사이에 대성당 작업실로부터 베키오 궁전 정면으로 옮겨졌는데, 불과 1km미만의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이틀이 걸렸습니다. 오늘날 여기에 세워져 있는 복제품은 피렌체의 정계로 들어가는 관문을 수호하는 상징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