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전문 공학가로 활동한 레오나르도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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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미상의 <체사레 보르지아의 초상>

이 초상화를 보면 자신만만하고 사나운 모습이 사자의 얼굴을 닮았는데, 보르지아는 사자사냥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1502년 로마에서 체사레 보르지아의 군사전문 공학가로 선임되었습니다. 오십의 나이에 자신이 꿈꾸던 일을 맡게 된 것입니다. 교황 알렉산더 6세와 로마의 고급 창녀 사이에 태어난 보르지아는 열여섯 살에 추기경이 되었지만, 스물두 살 때 성직을 박탈당했습니다. 로마를 수호하는 일을 맡은 그는 잔인했고, 속임수에 능했으며, 신앙심이 없었고, 근친상간을 범한 인물로 르네상스의 어두운 면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현혹시키거나 부패시킬 수 없을 때는 죽이고 약탈하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민들을 탄압하는 전제군주들을 공격하여 시민들의 권익을 찾아주고 상당한 평화를 누리게 했으므로 특히 부르주아들이 그를 영웅으로 추켜세웠습니다. 그는 스물일곱 살 때 이탈리아 중부를 정복함으로써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더가 원했던 교회의 슬로건 아래 이탈리아가 하나로 통일되는 과업을 거의 달성했으며, 나머지 지역에 대한 정복은 프랑스·스페인 전쟁으로 잠시 미뤄두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이 롬바르디아를 점령할 때 보르지아는 프랑스군과 행동을 함께 했습니다. 보르지아는 프랑스 왕 루이 12세로 하여금 교황이 원하는 대로 영국의 앤 공주와 결혼하도록 거들었습니다. 루이는 보르지아에게 작은 군대를 주고, 수입원을 제공했으며, 프랑스 시민권을 주고 발렌티노이스의 공작에 임명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그를 처음 만난 건 1499년 밀라노였던 것 같습니다. 성격이 강한 레오나르도와 보르지아는 서로의 지성에 경의를 표하며 독특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보르지아의 거칠고 당당한 성격에 매력을 느낀 것 같습니다.

레오나르도는 1502년 7월 토스카나 국경에 위치한 피옴비노에서 요새화와 습지의 수로에 관해 연구했습니다. 보르지아가 계략을 써서 쉽게 우르비노를 점령하자 레오나르도는 7월 말 그곳으로 가서 그를 만났습니다. 우르비노에서 레오나르도는 여행자들처럼 프란체스코 마르티니가 디자인한 계단을 드로잉하고 치수를 적어 넣었으며 요새를 신속하게 스케치했습니다. 그는 아드리아 해에 있는 페사로로 갔다가 리미니로 갔습니다. 며칠 후에는 로마냐의 수도 체세나로 갔습니다. 보르지아는 8월 18일 파비아에서 프랑스 왕과 책략을 꾀한 후 레오나르도에게 여권을 보내면서 자신이 그를 선임했음을 사람들에게 확인시켰습니다.

이 서류를 읽는 모든 상관 대리, 성주, 통솔자, 용병대장, 공무원, 군인,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한다. 이 서류를 소지한 우리의 총애를 받는 건축가이자 공학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는 우리 나라의 요새와 곳곳을 살펴볼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고, 그의 충고에 따라서 그것들을 보존할 것이므로 그와 그의 동료들에게는 어떤 세금도 부과해서는 안 되며, 그를 우호적으로 환영하고, 조사하고 측량하는 어떤 일에도 협조하라. 그가 작업을 하고자 할 때는 원하는 인력을 제공해주고 원하는 어떠한 도움이나 협력에도 응하라. 공학가는 자국 내에서 집행되는 어떤 작업이라도 사전에 레오나르도의 승낙을 받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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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빙어하는 육군을 공격하는 두 기병, 무기에 대한 드로잉>, 29.3-20.8cm.


레오나르도는 보르지아의 명을 받고 로마냐를 요새화하는 일에 적극 동참했으며, 특히 체세나와 포르토 체세나티코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습다. 로마냐에서는 공공·군사적 건물 건설을 주로 했고, 나머지 두 군데서는 많은 일을 했으며 마을과 항구를 연결하는 운하를 설립한 것이 특기할 만합니다. 보르지아와 함께 하면서 레오나르도는 당시 로마냐에 옵서버로 온 피렌체의 국무장관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1469-1527)를 알게 되었습니다. 위트 있는 시인이기도 한 마키아벨리는 1502년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석 달 이상 보르지아의 측근에 있었습니다. 기나긴 겨울 별로 할 일도 없을 때라서 레오나르도는 열일곱 살 아래인 젊은 마키아벨리와 많은 대화를 나눴겠지만, 두 사람이 각자에 관해 기록을 남기지 않아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보르지아의 개성과 행위는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걸작 『군주론 The Prince』를 쓰는 데 영감을 주었습니다. 볼테르와 몽테스키외는 『군주론』을 비난하고, 마키아벨리가 발렌티노이스의 공작을 우상으로 삼은 것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 책은 유일하게 읽을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의 탁월한 예술, 정치 이론가였습니다. 1498년 사보나롤라가 처형당하고 피렌체 정부는 공화국으로 개편되었으며, 금욕주의자들은 당국에 정치적, 종교적으로 과격한 재구성을 요구했습니다. 이런 요구를 촉구한 당파가 득세하여 마키아벨리는 스물아홉 살의 나이로 고등법원의 우두머리가 되어 외교문제와 국방문제들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1500년에 첫 임무를 띠고 프랑스로 가서 5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한 군주의 집권 하에 나라가 부강해진 걸 직접 목격했습니다. 프랑스 왕 샤를 8세는 1494년부터 이탈리아를 침공하기 시작했으며, 이탈리아를 넘보던 스페인과 힘을 겨루면서 프랑스는 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은 이제 오랜 과거사였으며, 이탈리아는 이 시기에 볼품없는 나라로 전락하고 있었습니다. 역사의식을 가진 지성인이라면 분노할 일이었고, 마키아벨리가 조국의 역사에 분통을 터뜨릴 만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철학은 공무원 생활에서 얻은 체험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 경험적인 것입니다. 즉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목적이 좋든 나쁘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극도의 개인주의였습니다. 그의 철학을 비판하기 전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당시 이탈리아 상황을 상기한다면, 열광적인 그의 국수주의는 이탈리아 역사의 산물임을 알게 됩니다. 정치가는 사기꾼 같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오히려 지성적이었으며, 그 시대상에서는 약소국이 강대국들로부터 자국을 보호하기 위한 상식적인 논리와도 같았습니다. 1513년 초에 방역모의로 체포되어 메디치 가에 의해 피렌체 부근 자택에 가택연급되어 있는 동안 유명한 『군주론』을 집필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피렌체로 돌아온 건 1503년 3월이었습니다. 노트북에는 그가 왜 보르지아의 측근에서 물러나 피렌체로 돌아왔는지에 관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는 보르지아의 난폭한 행위에 진력이 났고 또한 그의 몰락을 예감하고 일찌감치 그의 곁을 떠났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마키아벨리의 충고를 받아들여 피렌체로 돌아왔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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