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최초의 매너리스트 작품 <바쿠스>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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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로마 칸셀레리아의 전경


1495년 볼로냐에서 피렌체로 돌아온 미켈란젤로는 현재 이름만 전해지는 두 점의 조각 <세례 요한>과 <에로스>를 제작했습니다. 특히 1630년 초 영국 왕 찰스 1세에게 넘어갔다가 훗날 화이트홀 궁전의 화재로 소실된 <에로스>는 1496년 당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막 발굴해낸 고대 조각상 같은 이 작품은 중간상인들을 통해 골동품으로 판매되었을 정도였습니다. 이 뛰어난 솜씨 때문에 미켈란젤로는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처음 로마로 간 건 1496년 6월 25일이었습니다. 그는 피에로 데 메디치의 소개장을 교황 다음으로 막강한 권력과 재력을 갖고 있었던 추기경 산 조르조 리아리오에게 건네며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도착할 무렵 리아리오는 새로운 궁전 칸셀레리아를 건립했는데 이곳에서 산 조르조의 식구 250명가량이 살았으며 미켈란젤로는 잠시 그의 식구가 되어 그곳에 묵었습니다. 리아리오는 골동품을 아주 많이 소장하고 있었고 미켈란젤로는 그것들을 통해 고대 미술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를 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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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바쿠스>, 1496-97, 대리석, 높이 184cm. 받침대를 포함하면 203cm.

성기가 잘려나갔는지 일부러 생략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성기가 없는 바쿠스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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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텐 판 헴스커크의 <갈리의 정원에 있는 바쿠스 드로잉>

이 드로잉에서 바쿠스의 오른손이 떨어져나갔는데, 다른 고대 작품들과 어울리게 하려고 일부러 떼 낸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후 손과 술잔은 복원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1497년 7월 1일 아버지에게 “추기경이 의뢰한 것을 제작하고 있으니 피렌체로 돌아가지 않아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족스럽게 일을 마치고 그 대가를 받기 전에는 여기를 떠나지 않겠습니다. 대가들은 서두름이 없기 때문에 천천히 제작해야 합니다”라고 편지에 적었습니다. 이 작품은 <바쿠스>로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탄생시킨 것입니다. 하지만 리아리오는 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웃에 살면서 그의 일을 도와주는 야코포 갈리에게 주었습니다. 당시에는 예술의 내용을 결정하는 주체가 의뢰자였기 때문에 이 고전적인 현대 작품은 골동품을 선호하는 리아리오에게는 저급한 것으로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갈리의 정원에 로마 고대 조각들과 함께 장식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지난 8년 동안 조각을 대여섯 점밖에 제작하지 않았고, 그것들 모두 작은 것들이었으므로 실제 사람 크기보다 큰 <바쿠스>는 최초의 조각다운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패기와 더불어 대리석을 다룰 수 있는 기술이 충분했으며 스물두 살의 미켈란젤로에게 <바쿠스>는 야심적인 작품으로 대리석 깎는 솜씨가 탁월함을 시위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것은 고대의 이상화하는 형식을 살려낸, 당대의 감각으로 보면 새로운 영감에 의한 고전적 작품입니다.

미켈란젤로는 리아리오, 갈리, 미래의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될 지울리아노 델라 로베레, 그리고 그 외의 후원자들이 소장한 고대 미술품을 보고 고대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으며, 고대 조각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대 조각을 단지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재창조했습니다. <바쿠스>를 제작할 1496년 당시에만 해도 그가 제작한 것의 원형이 될 만한 고대 조각은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가 고대의 조각을 좋아했더라도 고스란히 모방한 것이 아니라 고대에 어울릴 만하게 창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조각이 그리스 조각을 빼닮은 것처럼 보여 고대 조각들과 나란히 놓을 경우, 멀리서 보면 고대 그리스인의 작품처럼 보이지만 근접해서 보면 그의 강렬한 표현 의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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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다윗>, 1501-04, 대리석, 높이 41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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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바쿠스>의 부분.

콘디비는 비틀거리는 바쿠스는 독한 술의 은유이며, “포도와 포도주에 지나치게 탐닉하는 자는 결국 자신의 삶을 망친다”는 걸 말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작품과 <다윗>에서 15세기 피렌체 자연주의 최후의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바쿠스를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묘사하겠다는 생각은 도나텔로의 발상에 머문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의 바쿠스도 술에 취해 오른손으로 잔을 높이 들고 있고 왼손 가까이에는 반인반수이자 호색가로 알려진 사티로스가 포도를 훔쳐 먹으면서 관람자를 향해 미소 짓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술꾼이 발이 떨리고 가득 채워진 술잔을 높이 쳐든 채 게슴츠레한 눈길로 어린 사티로스에게 의지하는 순간을 포착했습니다. 사티로스가 훔쳐 먹는 포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고대 포도주 신인 바쿠스에게는 포도가 얼마든지 있고 그의 머리조차 포도송이로 되어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통통한 사티로스를 모델로 삼아 개인적 특성과 거의 여자처럼 부드러운 신체를 만들어냈습니다. 또한 환상적 효과를 위해 드릴을 사용해서 사티로스 발아래의 사자 생가죽과 포도송이를 제작했습니다. 미켈란젤로 이전에도 로마인들은 드릴을 사용했고, 그 후에도 17세기를 대표할 만한 조각가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가 드릴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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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바쿠스>의 부분.


최초의 매너리스트 작품으로 알려진 <바쿠스>에서는 미켈란젤로의 고전주의 요소뿐 아니라 자연주의의 요소도 발견됩니다. 이 작품이 콰트로첸토(15세기) 거장들의 작품보다 더욱 자유스럽고 명쾌한 이유는 그가 고전주의적 요소 외에도 이전 세대가 이룬 자연주의적 성과를 계승 발전시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회화에서도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이전 화가들의 작품들은 이들의 작품들에 비해 딱딱하고 어색한 느낌을 줍니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에 와서야 회화와 조각은 고전적이면서도 자연스러워졌습니다. 15세기의 자연주의적 노력은 16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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