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사람이 새처럼 날 수는 없을까?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1496년 1월 2일 “내일 아침 나는 쇠띠를 만들겠다”고 적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비행도구를 처음 고안하려고 했음을 보여줍니다. 그가 비행도구를 염두에 두기 시작한 건 피렌체에서부터였으며, 아마 사춘기 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우피치에 소장되어 있는 드로잉을 보면 <동방박사의 경배>를 그릴 시기에 이미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482년 레오나르도는 롬바르디아에서 “사람이 새처럼 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적었습니다. 또한 1490년대에 새를 관찰했으며, 일종의 비행원리를 정립하면서 몇 가지 비행기구들을 스케치북에 디자인했습니다. 그는 “새는 수학적 법칙을 따르는 기능을 하는 기구이며, 인간은 이와 같은 모든 운동을 하는 기구를 재생할 능력이 있다”고 적었으며, 1495년 혹은 이듬해에 이 기구를 물리적으로 실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이 새와 같은 날개를 달고 싶어 한 건 고대부터 있었던 일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일찍이 선각자들이 불투명하게나마 생각한 비행운동에 대한 자료를 두루 살펴보았습니다. 중세에 바이드 드 오네쿠르가 인간이 부착할 수 있는 낙하산 같이 생긴 날개를 고안했는데, 레오나르도의 고안과 유사한 것으로 봐서 레오나르도가 그의 드로잉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헬리콥터처럼 프로펠러를 빠르게 회전하여 상승하는 원리로 날아 낙하산의 원리로 땅에 무사히 내리는 것에 관해 연구했습니다. 그가 생각한 프로펠러의 지름은 10m였고, 날개의 길이는 12m였습니다. 문제는 프로펠러를 돌릴 수 있는 기계였습니다. 그는 새 날개의 무게와 면적에 관한 상관관계를 연구했으며, 따라서 사다새 같은 일부 커다란 새의 경우 날개가 아주 짧은 데 반해 박쥐의 경우 몸체에 비해 아주 커다란 날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절대적인 원리가 적용될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드로잉을 보면 그는 실재 크기로 고안하면서 지레를 이용해 박쥐와 같은 커다란 날개를 사용했는데, 나무로 된 날개의 무게가 200파운드였습니다. 그는 여기서부터 출발하여 무게를 줄일 수 있는 다른 재료와 함께 다양한 날개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가볍고 강한 재료로써 날개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에 관해 연구하여 석회를 바른 강질의 소나무, 반수를 먹인 실크, 털을 덮은 캔버스, 기름이나 명반을 바른 가죽, 밑판에 갈대를 엮은 어린 소나무를 생각했고, 탄력을 위한 금속과 기구를 디자인했습니다. 그 중 가장 염두에 둔 건 카누처럼 생긴 것으로 노를 젓듯이 운전하는 것으로 나비 모양의 패달, 키, 등삭, 돛, 핸들, 멜빵, 곤돌라, 승강구, 조종 케이블, 완충물과 발판을 안으로 들여놓을 수 있는 착륙장치 등을 갖춘 것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 발명에 신념을 갖고 연구에 많은 시간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는 높은 곳에서 비행도구를 실험하고서 자신 있게 적었습니다. “기다란 포도주용 가죽부대를 허리띠에 부착하고 이 기구를 탄 채 호수 위를 날 경우 호수에 빠지더라도 물에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기구에는 날개를 움직이는 엔진이 부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직접 비행하는 실험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의 친구 파지오 카르다노의 아들 지롤라모 카르다노의 기록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이 기구를 몇 차례 실험했지만, 비행물체의 무게를 감소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데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는 매우 절망적인 상황에서 발명을 포기해야 했지만, 수년 후 피렌체에서 다시금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1496년 프란체스코 수도외 소속 수도승 루카 파치올리라는 인물이 밀라노로 왔습니다. 토스카나의 보르고 산 세폴크로에서 태어난 그는 한때 알베르티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에게 배웠고, 수학을 가르치는 일로 생활했습니다. 그가 밀라오에 온 건 루도비코의 부름을 받아 가르치기 위해서였는데, 바사리에 의하면 파치올리는 고전에 능통했으며, 유클리드로부터 레지몬타누스에 이르기까지 수학에 관한 모든 지식을 겸비했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는 그에게 매료되어 그의 논문을 연구했으며, 논문을 여러 페이지에 걸쳐 적으면서 그를 ‘마스터 루카’라고 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당시 화가, 건축가, 공학가가 아는 정도의 실질적 기하에 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수학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은 결여하고 있었습니다. 대수학에 관해선 문외한이었던 그는 그보다 서너 살 많은 파치올리를 통해 많은 걸 배웠습니다. 그의 노트북에는 제곱근, 곱하기, 나누기, 복잡한 공식, 공준postulate, 등식, 기하학적 형상들인 정삼각형, 정사각형, 육각형, 동그라미, 자른 구면 등이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갖가지 수학의 부호를 적으면서 “수학자가 아니면 나의 기록을 읽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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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 원형 De divina pro-portione』의 삽화, 1509년 베네치아에서 출간.

파치올리가 저술하고 레오나르도의 삽화가 삽입된 책의 서문에서 파치올리는 레오나르도를 “화가, 투사화가, 건축가, 음악가들에게 가장 소중한 재능을 타고난 피렌체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 적었습니다.



파치올리는 레오나르도에게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설명했고,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발명한 것들이 기록된 노트북을 보여주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삽화가 삽입된 파치올리의 『인체 원형 De divina pro-portione』이 출간되기 전인 1498년 두 사람은 사본을 루도비코와 갈레아조 다 산세베리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바사리는 파치올리가 레오나르도의 지식을 자신의 것인 양 책에 적었다고 비난했습니다. 바사리의 말이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파치올리와 레오나르도는 서로가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으며,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레오나르도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에 파치올리의 수학적 지식이 기하학적 구성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된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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