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초 데 메디치가 타계하다
작품을 Daum'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로렌초 데 메디치의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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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로렌초 데 메디치의 임종>
미켈란젤로가 <계단의 성모>와 <켄타우로스의 전투>를 제작하면서 조각가로서의 길을 걸으려고 노력하던 때 피렌체의 지도자 로렌초 데 메디치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로렌초는 아내가 사망한 후 정성을 다해 일곱 명의 자녀를 교육시켰고, 그들의 결혼을 통해 피렌체에 번영을 가져왔습니다. 장남 피에로 데 로렌초를 오르시니 가문의 여자와 결혼시켜 로마에 친구들을 만들어두었으며, 막내아들 줄리아노를 사보이의 공녀와 결혼시켜 프랑수아 1세로부터 느무르의 공작 칭호를 받게 했으며, 프랑스와 피렌체 사이에 다리 놓는 일을 성사시켰습니다. 성격이 좋고 예의바르며, 라틴어에 능통하고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은 둘째 아들 조반니는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로렌초는 이노켄티우스 8세로 하여금 선례를 깨뜨리고 열네 살인 둘째 아들을 추기경으로 임명하게 했습니다.
로렌초는 늙으면서 관절염과 팔 다리 염증에 시달렸고, 열서너 차례에 걸쳐 다양한 치료를 받았지만, 고통을 더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적인 일과 사업을 장남 피에로에게 물려주고 시골로 내려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평화로운 생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활도 잠시, 1492년 3월 21일 복부의 통증이 매우 심해지자 전문 의사들이 달려가 그에게 보석들을 마시게 했지만,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로렌초는 미란돌라와 폴리자노에게 자신이 더 이상 고대 사본들을 수집하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그는 죽음에 임박해서 사제를 불러 무릎을 꿇고 고해성사를 했지만, 사제는 로렌초가 자유를 파괴하고 잚은이들을 부패하게 했으므로 용서받을 수 없다는 완강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로렌초는 서둘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를 불러들였습니다. 사보나롤라는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것, 더 살게 되면 삶의 태도를 바꾸겠다고 약속할 것,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 등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에게 서운하게 대했던 로렌초가 미켈란젤로에게는 아버지와도 같았습니다. 로렌초는 특별히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격려해주었으며, 일찍이 그의 보호 아래 들어간 미켈란젤로는 정신적으로 그에게 의지했습니다. 1492년 4월 9일 43살의 로렌초가 타계하자 미켈란젤로는 정신적 지주이자 든든한 후원자를 잃은 셈이었습니다. 콘디비는 로렌초의 타계가 예술가로서의 미켈란젤로가 맞이한 첫 시련의 국면이었으며, 미켈란젤로는 슬픔이 커서 한동안 작업을 할 수 없었다고 적었습니다. 로렌초의 타계와 함께 미켈란젤로의 정기적인 수입이 사라졌습니다. 이런 경우 예술가들은 보통 기존 예술가의 작업장에 소속되어 조수로 일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작업장을 열고 스스로 일감을 찾아야 했지만, 미켈란젤로는 이런 전통적인 방법을 택하지 않고 새로운 후원자를 물색했습니다. 자신의 작업장을 갖는다는 건 집세를 내고 재료를 사들여야 하며 일감을 얻기 위해 경쟁도 해야 한다는 걸 의미했는데, 열일곱 살의 그로서는 이런 일들을 해낼 자신이 없기 때문에 아버지의 집에서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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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데 케탐의 <인체해부>, 1493, 채색목판화, 30.4-20.6cm.
미켈란젤로는 1492-93년 겨울 해부를 통해 인체를 연구했는데, 당시 해부는 감독자 하에 숙련된 의사의 해부장면을 보면서 연구하는 것으로 겨울에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당시 교회가 해부를 금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며 교회가 금한 건 무덤에서 시신을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산토 스피리토 수도원에서 해부학을 공부했습니다. 산토 스피리토 수도원의 부원장 조반니 비키엘리니는 미켈란젤로가 해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수도원의 방 하나를 사용하도록 선처했습니다. 그는 해부를 통해 인체를 연구했으며, 주로 사람보다는 동물을 더 많이 해부했습니다. 그는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회화와 조각을 위해 해부한 것이지 해부학을 위해 한 건 아니었으므로 근육과 뼈의 구조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콘디비는 그가 1553년까지 해부했고, 그의 해부학적 지식은 예술가에게 필요한 정도에 그쳤을 뿐 상세하지 않았다고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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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십자가 처형>, 1492-93년경, 나무에 채색, 135-135cm.
피렌체의 카사 부오나로티(미켈란젤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은 산토 스피리토 수도원의 부원장 조반니 비키엘리니를 위해 제작한 것으로 수세기 동안 사라졌다가 1962년에 발견되었는데, 누군가에 의해 두꺼운 칠이 입혀 있었습니다.
콘디비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이 시기에 <십자가 처형>을 제작했다고 합니다. 이 조각은 근래 산토 스피리토 수도원에서 발굴된 것으로 그의 유일한 나무조각입니다. 현재의 이 작품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원작에는 그리스도의 허리에 옷이 걸쳐져 있었을 것이나 현존하지 않으며, 이마에 패인 부분으로 미뤄 가시관이 머리에 얹혀져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