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현되지 못한 레오나르도의 기마동상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밀라노에서 파견된 루도비코의 특사가 1489년 7월 22일자로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보낸 편지에는 루도비코가 그의 아버지를 기념하는 기마상을 레오나르도에게 의뢰한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루도비코 경께서는 부친을 위해 묘비를 만들 계획을 갖고 계시며, 이를 위한 모델을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제작하도록 이미 명하신 상태로 갑옷으로 무장한 프란체스코 공작께서 말을 타고 계신 모습을 거대한 청동으로 제작하는 것입니다. 경께서는 이 작품이 매우 훌륭하고 전례에 없는 것이 되기를 바라시며, 저더러 전하께서 이런 작품에 재능이 있는 피렌체 예술가 한두 명을 보내달라는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경께서는 이미 레오나르도에게 위임하셨지만 제가 보기에는 레오나르도가 제대로 완성해낼 것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편지에 언급된 루도비코의 청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로렌초는 피렌체 조각가를 보내지 않았으며, 루도비코도 더 이상 청하지 않았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몇 달 뒤 이 작업을 위한 습작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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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스포르차 기념비에 관한 필사본 페이지>, 1493년경, 21-1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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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바닥에 장치할 용광로와 ‘스포르차 말’을 뜨기 위한 투시도 디자인>, 27.8-19.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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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의 기념 기마상>, 대리석 위에 청동, 말과 가마자의 높이 395cm.
레오나르도는 1484~5년부터 기마상을 청동으로 제작할 수 있기만을 기다리면서 소일하고 지냈습니다. 그는 말을 드로잉으로 습작했으며 커다랗게 청동으로 뜨는 기술에 관해 연구했습니다. 중세 사람은 4.24m나 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동상을 세웠지만, 이런 기술이 제대로 전수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도나텔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서 영감을 받아 1453년 처음으로 기념비적인 청동조각 <가타멜라타>를 제작했으며 파비아에 있는 이 작품은 높이가 3.2m나 됩니다. 다시금 거대한 크기의 청동조각에 예술가들이 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베로키오 역시 이에 관심이 많아 1478~88년 베네치아에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의 기념 기마상>을 세웠는데 4m 가까운 조각을 청동으로 뜬 것입니다. 레오나르도가 이런 거대한 작업을 하고 싶어 한 건 당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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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매장 기념 기마상을 위한 스케치>, 27.8-19.8cm.
그러나 레오나르도가 지난 6, 7년 동안 준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이유 없이 이 프로젝트는 그에게 위임되지 않았습니다. 공학 건축가로 명성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그가 이 작업을 완성시킬 능력이 없는 것으로 판명된 것입니다. 이유가 설명되지 않았으므로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구상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가 구상한 조각은 <동방박사의 경배> 배경 왼쪽에 말을 탄 사람의 모습으로 말이 앞다리를 들고 서 있는 장면입니다. 그의 드로잉에도 앞다리를 든 말 위에 누드의 남자가 바톤을 든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왁스로 작은 크기의 이런 형상을 만들었을 테고 더 나아가 청동으로도 제작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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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델 폴라이우올로의 <기마상에 대한 습작>, 28.8-25.5cm.
하지만 이런 형상을 작게 제작할 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아주 큰 규모로 제작할 때는 앞다리를 든 말을 고정시키기란 어려웠을 것입니다. 레오나르도만이 이런 형상을 고안한 것은 아니고 안토니오 델 폴라이우올로를 포함한 몇 사람도 이런 구상을 했습니다. 이런 형상은 드로잉할 때에는 매우 훌륭하지만 청동으로 실현시키기에는 불가능합니다. 수 톤에 이르는 무게를 말의 뒷다리로 지탱하게 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으며 앞다리 하나라도 더 있어야 지탱할 수 있습니다. 루도비코는 실재 말보다 서너 배 크고 장려한 형상으로 제작하기를 원했으므로 레오나르도의 구상대로 실현시키기란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1496년경 그가 쓴 노트북에는 “말에 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데, 언제 가능한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가 수년 전에 제작한 흙으로 빚은 모델은 금이 가고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동상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과연 레오나르도에게 그것을 제작할 능력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미켈란젤로에 의해 제기되었고 사람들은 동상이 제작되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레오나르도에게 돌렸습니다. 바사리는 레오나르도가 지나치게 야심을 갖고 작업에 집착했지만 완성시키지는 못했다면서 페트라르카의 싯귀를 인용하여 “그 작품은 욕망에 의해 연기되었다”고 적었습니다.
그러나 작품의 미완성은 당시의 상황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나폴리, 프랑스와의 전쟁의 위기 속에서 그만한 청동을 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200년이 지난 후 프랑스 조각가 프랑수아 지라르동은 루이 14세의 동상을 높이 6.82m로 제작했는데, 레오나르도가 고안한 청동 뜨는 법과 거의 유사한 방법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이 동상은 프랑스 혁명 때 파괴되어 현존하지 않지만, 당시의 기록에는 레오나르도가 실험한 방법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기술에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당시의 위급한 상황으로 인해 청동을 구할 수 없었던 데 원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