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의 밀라노 도시계획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 갔을 당시 그곳에는 일류 음악가와 시인들이 많았습니다. 그곳에는 훌륭한 대학이 있었으며, 파비아에 소재한 대학에는 90명의 교수들이 법학·의학·철학·수학을 가르쳤습니다. 최초의 그리스어 책이 발간되기도 했으나 미술에 있어서는 마스터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롬바르드 양식 Lombard style’이란 혼성 방법으로 조토와 피사넬로, 그리고 훗날의 토스카나·베네치아·플랑드르 예술가들의 영향이 어우러진 것입니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 오기 전까지는 그곳의 유일한 주요 예술가로 빈첸조 포파를 들 수 있습니다. 브레스치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타계한 빈첸조는 밀라노에서 주로 활약했습니다. 바사리에 의하면 그는 파도바에서 수학했고 원근법에 뛰어났으며 양식에 있어서는 만테냐의 영향이 두드러졌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서 활약함으로 해서 이 도시의 롬바르드 양식 회화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로부터 수학한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Donato di Angelo, 1444년경-1514)가 밀라노에 있었지만, 그는 회화보다는 건축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회화를 포기한 듯했습니다. 바사리는 그를 새로운 브루넬레스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 공작으로부터 청동기마상을 의뢰받고 싶어 했듯이 브라만테 역시 공작으로부터 건축을 위임받고 싶어 했습니다. 두 사람은 곧 친구가 되었습니다.

건축가이자 화가인 브라만테는 성기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초기에는 회화에 헌신했지만, 건축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우르비노 근처에서 태어나 우르비노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의 궁전에서 수학했고, 라벤나와 만토바를 여행했습니다. 그가 밀라노에 안주한 때는 1480년경이었으며, 1481년에 현존하는 건축에 관한 디자인을 엔그레이빙으로 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의 첫 건축물 산타 마리아 예배당을 디자인했습니다. 현존하는 유일한 프레스코는 밀라노의 브레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1480-85년경에 그린 무장한 군인들의 모습입니다. 1499년에 로마로 갔으며, 1506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개축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에서 화가로 활약한 기록이 없어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고 건축에만 전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사리에 의하면 바티칸 스탄차에 있는 라파엘로의 프레스코 <아테네 학당>에 보이는 건축적 배경을 브라만테가 디자인했습니다. 라파엘로는 고마움의 표시로 그를 <아테네 학당>에서 수학자 유클리드로 묘사했습니다.

레오나르도와 브라만테 두 사람 모두 수학에 관심이 많았고, 알베르티의 이론을 좋아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건축에 관심이 아주 많았으며, 여덟 살 정도 연상인 브라만테는 류트를 즉흥적으로 연주하기 좋아했고, 또한 음악 감상을 즐겼습니다. 두 사람은 각기 갖고 있는 지식을 나눴으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브라만테는 시에도 관심이 많아 소네트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는 같은 나라 예술가들을 시기하지 않았고, 레오나르도의 재능을 칭찬했으며 훗날 라파엘로를 바티칸에 소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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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두 레벨로 구획된 도시 드로잉>

두 지역을 높낮이로 구획하면서 높은 지역은 사람들의 통행지역으로 상류층과 고상한 건물들이 건립되며, 수로 가까이에 있는 낮은 지역은 물품을 보관하고 소매상인과 기술공들, 그리고 일반 시민들의 거주지역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지독한 엘리트주의로 보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지를 따로 정한 건 “끊임없는 고난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모든 사람의 삶의 질을 높이려는 노력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강둑을 따라 정돈된 이상적인 밀라노 도시를 구상했습니다. 노트북에 의하면 도시를 5천 채의 집이 있는 마을 다섯 개로 구획하고 각 마을에 30만 명이 거주할 수 있도록 도시를 계획했습니다. 그는 수로에 의한 십자형의 새로운 도시를 구상하면서 수로가 운하 역할을 하고, 정원에 물을 대며, 풍차칸과 수문으로 거리의 먼지를 닦아내게 했습니다. 건물의 외관을 높이고 거리의 폭을 넓게 해서 가능한 많은 빛이 건물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했으며, 굴뚝을 지붕보다 높게 만들어서 연기가 위로 흩어지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도로를 따라서 하수도를 만들어 사용한 물이 주거지역에서 흘러나가게 했습니다. 노트북에는 건물 내부에 화장실이 넉넉해야 하고, 걸터앉는 시트를 현대화하여 회전문처럼 360。 회전해야 하며, 천장에 많은 구멍을 내어 환기가 잘 되게 해야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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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건축에 관한 습작>, 14.5-21.9cm.


레오나르도는 1484년 밀라노를 강타한 전염병 페스트로 인해 도시계획에 더욱 적극적이었습니다. 이 전염병은 15세기에 유럽의 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어 인구를 크게 감소시켰습니다. 병에 걸린 사람들은 격리되었고, 그들이 사용한 옷과 침구는 사망 후 불에 태워졌습니다. 매장 인부들은 페스트로 죽은 사람을 매장할 때는 많은 돈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의 시신은 방치되었고, 자치 단체에서 구덩이를 파고 이들을 묻어주어야 했습니다. 보카치오가 『데카메론 Decameron』에서 적은 대로 “형제가 형제를 떠나고, 삼촌이 조카를 남겨두고 떠나며, 종종 아내가 남편을 두고” 떠났듯이 최상의 방법은 모든 것을 두고 공기 좋은 먼 곳으로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은 울부짖으며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검은 죽음’으로 불리는 페스트는 1479년 피렌체에서도 퍼진 적이 있었지만, 수주 후 가라앉았습니다. 그러나 밀라노의 경우 전지역의 4분의 1에서 2년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사망자의 수는 수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전염병의 위협을 방지하기 위해 도시계획을 도심과 도시 밖으로 넓게 확장해 구상했습니다. 그는 지도와 밀라노에 관한 책자를 참조했는데, 그만이 도시계획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찍이 알베르티, 비트루비우스, 필라레테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당대에는 브라만테와 프란체스코 마르티니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도시계획을 누구에게 보여주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노트북에는 ‘존귀하신 루도비코 경에게’라고 적혀 있지만 미완성의 편지입니다. 그가 정녕 자신의 도시계획이 실현되리라 믿었고 많은 자금이 소요되는 거대한 작업을 자신이 맡아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도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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