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의 미완성의 완성 <동방박사의 경배>, <광야에서 기도하는 성 제롬>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동방박사의 경배>, 1485-86년경, 패널에 템페라, 175-280cm.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을 위한 제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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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동방박사의 경배>, 1488, 패널에 템페라, 285-24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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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동방박사의 경배>, 1481-82년경, 미완성, 패널에 유채와 템페라, 24.3-24.6cm.

레오나르도는 세 명의 동방박사들이 감히 구주 가까이 가지 못한 채 조금 떨어진 데서 경배하는 장면으로 묘사했습니다. 세 사람 모두 늙은 현인들로 수수한 의상에 겸허하고 지친 모습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동방박사들 중 한 명은 발타사르로 흑인으로 알려졌지만, 이 그림에서는 모두 백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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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동방박사의 경배를 위한 습작>, 브라운 수채, 16.3-2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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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동방박사의 경배를 위한 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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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동방박사의 경배를 위한 습작>



로렌초는 레오나르도를 산 마르코 정원에서 작업하게 하고 막강한 동맹국 밀라노의 공작을 알현하여 그를 위해 수금을 연주하게 했습니다. 이는 로렌초가 레오나르도를 예술가로서 높이 평가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1480년경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로 떠나기 몇 달 전, 제단화 <동방박사의 경배>를 위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피렌체 근처 스코페토의 산 도나토 수도회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거의 2.5m(243cm×246cm)의 정사각형 크기로 그의 개성이 잘 나타난 작품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작은 인물화가 아니라 수십 명이 등장하는 장대한 규모로 구성했습니다. 아직 여러 회화적 요소에 마음이 동요되던 15세기의 특성이 나타나 있지만, 주요 대상을 부각시키는 방법이 새롭게 드러납니다. 보티첼리와 기를란다요도 <동방박사의 경배>를 그렸지만, 이들은 사람들이 에워싼 가운데 성모가 크게 두드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처음으로 성모를 두드러지게 구성했습니다. 독립적이고 단순하게 모습을 드러낸 성모와 그녀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의 대조는 그만이 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나타났습니다. 보통 화가들이 성모를 다리를 벌린 자세로 옥좌에 앉은 모습으로 그린 데 비해, 그는 두 무릎을 모은 섬세하고도 여성적인 자세로 표현했고 이는 후대 화가들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피에로가 산 도나토 수도회 수도승들의 법적 문제를 취급하고 있었으므로 아들을 그곳에 소개한 것 같습니다. 레오나르도는 1481년 3월 아버지가 작성한 특이한 계약서에 서명했는데, 수도승들이 작품에 대해 돈을 지불하는 대신 발델사에 있는 땅을 주기로 한 것입니다. 제단화를 24~30개월 사이에 완성시켜야 한다는 단서도 있었으나 레오나르도는 작품을 완성시키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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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동방박사의 경배를 위한 습작>, 28.4-21.3cm. 루브르 박물관 소장


레오나르도는 성서의 기록에 제한받지 않으면서 관람자가 직감적으로 <동방박사의 경배>가 어떤 사건인지 알 수 있도록 묘사했습니다.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는 <동방박사의 경배를 위한 습작>을 보면 마굿간과 소, 당나귀가 그려져 있어 처음에는 전통 도상을 따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종 그림에는 이런 공현축일의 전통적 요소들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 요소들을 한 화면에 담는 15세기의 특성은 있지만, 주요 대상을 부각시키는 방법은 레오나르도의 새로운 감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특이한 점은 성모와 아기 예수를 중심으로 주변의 공간이 제대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장면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는 불필요한 상황의 세밀한 묘사를 생략했으며, 세 가지 예물 중 유향과 몰약을 바치는 것으로 제한했습니다. 이 그림을 위한 드로잉에는 배경에 낙타가 있지만, 최종 그림에는 낙타는 없고 말을 탄 사람의 모습이 보입니다. 배경에 종려나무와 쥐엄나무가 보이는데, 종려나무는 평화를 상징하는 나무이고 쥐엄나무는 세례 요한의 상징이자 유다가 목을 매고 자살한 나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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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동방박사의 경배를 위한 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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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용과 싸우며 두 다리로 선 말 탄 사람>, 13.6-18.9cm.


이 작품에는 그 외 성서가 언급한 내용에 관한 상징물이 없습니다. 13세기 멘데의 주교 기욤 두랑드가 “교회 안에 있는 그림과 장식은 평신도들을 위한 읽기이다”라고 했지만, 레오나르도는 그런 의미에서 이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회화적 동기는 그의 다른 종교화에서도 나타납니다. 성서에 대한 그의 해석은 교회의 입장과 사뭇 달랐습니다. <동방박사의 경배를 위한 습작>에서 보듯 상단에는 말 탄 사람들이 서로 살상하며 전투를 벌이고 있어 고대 세계의 혼돈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쥐엄나무 주변에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아는 무리가 놀라움과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구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서에 대한 그의 해석입니다.

이 그림을 보고 필리포 리피, 기를란다요, 보티첼리가 감동을 받았고, 특히 라파엘로가 영감을 받아 이런 요소를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에 프레스코화를 그릴 때 응용했습니다. 미켈란젤로도 성모 주변의 어둠 속에 환각 상태에 빠진 사람들의 얼굴에서 영감을 받아 이런 무리를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산 도나토의 수도승들은 레오나르도의 이처럼 특이한 작품을 마음에 들어 했고, 그가 속히 완성하기를 바랐습니다. 1481년 6월 수도원은 계약서를 정정해서 경제적으로 곤궁한 상황의 그가 좀 더 적극적으로 작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물감 사는 데 필요한 돈을 지불해주었습니다. 또한 수도승들은 그에게 수도원의 시계를 노란색과 파란색으로 칠하게 하고 장작 한 짐과 커다란 통나무 하나를 주었습니다. 7월 수도원은 그에게 28플로린을 지불하고 여름이 끝날 무렵에는 밀 한 부셰르(약 2말)를, 9월 28일에는 붉은 포도주 한 통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수도원 기록부에 적힌 내용 전부였고, 어려운 경제사정에 처한 레오나르도는 겨울이 다가올 무렵 더 큰 작업을 얻기 위해 밀라노로 갔습니다. 1481년은 그가 다른 예술가들과 더불어 바티칸에 초대되지 않았고, 어려운 경제상황에 빠진 최악의 해였던 것 같습니다.

그가 <동방박사의 경배>를 거의 완성단계에까지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완성하지 않은 건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16세기를 대표할 만한 작품이 될 수 있는 독특한 구성의 이 작품을 왜 완성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은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의문이 됩니다. 이 점에 대해 바사리는 아주 간단하게 그가 “변덕스럽고 불안정했기” 때문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술에 관한 지식이 많은 그는 많은 프로젝트를 받았지만 그 어떤 것도 완성시킬 수 없었는데, 자신이 생각한 완전함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으며, 또한 문제가 “너무 난해하고 너무 기묘하므로” 재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라 했습니다. 바사리가 말한 대로 레오나르도는 이 작품과 <광야에서 기도하는 성 제롬>에서 미학적 문제에 봉착했기 때문에 완성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 평론가들은 이 상태를 완성으로 봅니다. 이 상태에서 이미 레오나르도의 의도가 명확하게 달성되었다고 보며, 이는 완성에 대한 르네상스 개념과 오늘날의 개념이 매우 차이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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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광야에서 기도하는 성 제롬>, 1478-80년경, 미완성, 호두나무 패널에 유채와 템페라, 102.8-73.5cm.

'교회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롬은 로마와 가울에서 살다가 성서를 번역하기 위해 안디옥 근처 샬시스 광야로 가서 수행자의 생활을 하면서 지냈고, 베들레헴에서 말년을 보냈습니다. 그는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주석을 달았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사자의 발에 박힌 가시를 빼준 후 사자의 친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광야에서 기도하는 성 제롬>은 정확하게 언제 그렸다는 기록은 없고 1480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레오나르도는 제롬을 나이를 초월한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바싹 마른 체구에 움푹 들어간 눈으로 표현했습니다. 제롬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구주를 바라보듯 어딘가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의 앞에는 사자가 앉아 있고 제롬의 오른손에는 돌이 들려 있는데, 자신의 가슴을 치는 데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메디치 가와 몇몇 피렌체의 부유한 가문에서는 야생동물을 길르고 사자 외에도 기린 등을 길렀지만, 실제 사자를 화폭에 옮겨놓은 것은 레오나르도가 처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누구를 위해 이 작품을 패널에 그리기 시작했으며 왜 미완성으로 남겼는지 알 수 없습니다. 머리 부분의 패널은 훼손된 채 18세기까지 남아 있다가 19세기에 와서야 보수되었습니다. <베노이스 성모>와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누구의 작품인지도 모르게 남아 있다가 19세기 초 우연한 기회에 레오나르도의 작품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아저씨뻘이 되는 추기경 페슈는 어느 날 로마의 거리를 걷다가 고물상 뒤켠에 훌륭한 그림이 그려진 작은 찬장을 발견했습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본 그는 르네상스 대가의 작품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찬장 문은 다름 아닌 <광야에서 기도하는 성 제롬>의 머리 부분이었습니다. 페슈는 머리 부분을 떼어낸 나머지 패널이 로마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믿고 여러 달 동안 수소문한 끝에 한 구두점에서 발견했습니다. 구두수선공이 그것을 의자에 못을 박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페슈는 머리 부분을 부착하여 유약을 발라 보수했으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년 후인 1845년 바티칸이 소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레오나르도가 인물을 묘사할 때 얼마나 해부학적 정확함을 추구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미완성이지만 제롬의 목과 앙상한 갈비뼈가 실재 인체를 묘사했음을 알게 해줍니다. 이 작품은 절망한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처절한가를 알게 해줍니다. 이 그림을 그릴 때 그는 스물아홉 살 내지 서른 살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절망감에 빠져 있었고, 외로움을 느낄 때였습니다. 비탄의 글을 많이 쓴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며칠 전에 말했듯이 난 완전히 의욕을 잃었고 … ”라고 적었습니다. 그의 노트북에는 단어를 갖고 발음으로 뜻이 되게한 글들이 있습니다. 그는 증조부의 이름 디 세르 피에로di ser Piero를 di. s. p. ero로 적어 ‘절망한다dispero’가 되게 했습니다.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서재의 성 제롬>, 1475, 패널에 유채, 45.7-36.2cm.


많은 화가들이 제롬을 그렸는데, 안토넬로 다 메시나는 서재에 있는 학자의 모습을 그렸으며, 코시모 투라는 은둔자로 그렸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투라와 마찬가지로 제롬을 학자보다는 참회하며 고행하는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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