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의 미학적 대변인 스테판 말라르메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마네의 <생라자르 역 Gare Saint-Lazare>, 1873, 유화, 94-115cm.

기차가 파리 시내를 달리게 된 건 1830년 말부터였습니다. 철도를 둘러싼 갖가지 정경은 현대를 알리는 풍속으로 도미에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의 관심사였습니다. 마네도 철도에 대한 관심이 많았지만, 배경으로만 사용했습니다. 화면에 기차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기차가 방사한 연기만 보이는데ㅡ 기차가 지금 역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연기는 기차의 혼이 살아 있는 것처럼 허공에 떠 움직입니다. 이 구도에는 참신함이 있고, 청색과 흰색의 조화가 주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올랭피아>의 모델 빅토린을 모델로 한

마지막 그림입니다. 그녀는 미국으로 갔다가 얼마 전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책을 펴서 무릎에 놓은 채 관람자를 바라보는 빅토린의 얼굴에서 아무런 감정도 발견할 수 없는데, 10년 전의 <올랭피아>에서보다는 한결 부드러운 표정입니다. 빅토린 옆에 파란 리본을 허리에 장식한 흰 드레스를 입고 관람자에게 등을 돌린 채 기차를 바라보는 소녀는 화가 알퐁스 이르슈의 딸로 화면에서는 빅토린의 딸처럼 보입니다. 마네는 알퐁스의 정원에서 소녀의 모습을 그렸으며, 그 모습을 여기에 삽입해 구성했습니다.


마네는 1873년에 유화 20점을 그렸습니다. 전년도의 10점에 비하면 두 배나 작업한 셈입니다. 그해 그린 <생라자르 역>을 이듬해 살롱에 소개했습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작품에 나타난 철로는 마네의 화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생라자르 역 근처에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마네의 고도의 기교와 지성적 복잡함이 나타난 가장 이상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이 작품에서 그가 인물화 화가임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평론가 란드는 “벨라스케스는 반사된 공간의 복잡함을 <라스 메니나스>에서 구성했고, 마네는 마음의 복잡함을 반영하는 <생라자르 역>을 구성했다”고 평했습니다. 평론가들은 마네가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지나치게 모방한다고 비난했는데, 벨라스케스와 그의 관계가 잘 나타난 것이 이 작품입니다. 마네는 벨라스케스를 모방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회화에서 요구하는 것을 수용하고자 했습니다.


218

마네의 <빨래 Washing>, 1875, 유화, 145-115cm.

말라르메는 “이 작품은 우리의 모든 사고를 화면에 옮기는 방법에 대한 오나전하고 결정적인 모범이다”라고 적었습니다.


마네가 10년 연하의 스테판 말라르메를 만난 것은 1873년 10월이었습니다. 이때 젊은 말라르메는 독특한 시로 파리 문단에 막 이름을 알리고 있었고, 미술에 관심이 많아 평론을 썼습니다. 그는 보들레르와 졸라에 이어 마네의 중요한 후원군이 되었고, 곧 마네의 미학적 대변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1874년에 ‘마네의 1874년 그림들’이라는 글을 썼으며, 1876년에 쓴 ‘인상주의와 에두아르 마네’는 런던의 한 신문에 실렸는데, 이 글에서 마네의 <빨래>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화가로서의 마네의 삶에 한 획을 긋는 것으로, 어쩌면, 아니 틀림없이 미술사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 투명한 빛으로 반짝이는 대기는 얼굴, 옷, 나뭇잎에 내려와 걸린다. 이때 사물은 자체의 실체를 확고하게 붙들고 있는 듯하지만, 이내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햇빛과 거대한 공간이 그것들의 윤곽을 침범해 들어가면서, 실체를 방어하는 껍질에 불과한 윤곽은 무참히 녹아 대기 속으로 날아 가버린다. 예술이 고집스럽게 드러내고자 하는 모든 것의 실체를 바야흐로 대기가 완전히 지배한다.


218-1

마네의 <예술가 The Painter>, 1875, 유화, 193-130cm.

이것은 화가이면서 판화가 그리고 극작가이자 화상 마르셀랭 데부탱의 초상화입니다. 그는 풍채만 모델로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 성격 또한 “그림이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데부탱은 피렌체 근교에 광대한 땅을 유산으로 받았지만 탕진했고, 1870년 파리로 돌아와 판화로 초상화를 제작하여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마네는 초상화를 그릴 때에 “특이한 인격을 그린다”고 했는데, 데부탱의 자만심과 불안을 훌륭하게 부각시켰습니다.


마네는 이 작품을 1876년 살롱에 출품했는데, 심사위원 열다섯 명 대부분은 당시의 대담한 두 경향, 즉 인상주의 화법과 자연주의 주제를 혼용한 이 그림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이것 외에도 카페 게르부아에 자주 오던 화가이면서 판화가인 마르셀랭 데부탱을 모델로 그린 <예술가>도 출품했는데, 모두 낙선했으므로 몹시 화가 나 있던 마네에게 말라르메의 글은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해 4월 5·6·7일자 신문에 마네가 살롱에 낙선한 이야기가 보도되어 파리 시민들이 그 사실을 알았다.


219

마네의 <스테판 말라르메의 초상 Portrait of Stéphane Mallarmé>, 1876, 유화, 27.5-36cm.

말라르메는 샤를 보들레르 다음으로 마네의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이 상징주의 시인은 꾸준히 마네의 미학을 옹호했습니다. 마네는 서른네 살의 시인의 모습을 매우 사변적인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널리 퍼진 두 눈썹, 상념으로 산발이 된 머리카락, 손가락 사이에 있는 불이 붙여진 시가, 노트 위에 올려놓은 오른손과 엄지손가락만 내놓고 주머니 속에 넣은 왼손 등의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말라르메는 이런 모습으로 앉아서 마네가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그릴지 궁금해 하며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마네는 그리기를 마친 후 너무 작게 그린 걸 후회하고 오른쪽에 2cm가량 캔버스를 늘이고 벽지의 색을 칠했습니다.


마네는 말라르메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그해 <스테판 말라르메의 초상>을 그렸습니다. 8년 전에 그린 에밀 졸라의 초상화는 사실주의에 근거했지만, 말라르메의 초상은 힘 있는 표현주의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말라르메가 편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배경의 벽지는 단순한 디자인에 엷은 색이라서 말라르메의 모습을 두드러지게 합니다. 붓놀림과 색조로 미루어 그가 단번에 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르주 바타유는 이 그림을 “위대한 두 영혼 사이의 애정을 표현하는 작품”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스테판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는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유아시절의 대부분을 파리 남동쪽으로 65마일 떨어진 시골 상스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학교에 재학할 때 라틴어, 그리스어, 영어에 뛰어났고, 이미 시를 썼습니다. 이바뇽과 투르에서 교사 경험이 잇는 그는 1871년 파리로 와서 생라자르 역 근처에 잇는 퐁탄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4년 후 이사한 롬 가는 마네의 화실에서 걸어서 몇 분밖에 안 되는 곳이었습니다. 말라르메는 수업이 끝나면 마네의 화실에 들러 오래 대화를 하다 가곤 했습니다. 앙리 드 레니에는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말라르메는 화가들의 천재적 소질을 알아보는 눈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마네의 인간성에도 크게 매료되었던 것 같다. 그는 늘 마네에 관해 이야기했으며, 그의 말에는 마네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가득했다.

마네는 말라르메를 위해 그가 번역한 에드거 앨런 포의 『갈가마귀 The Raven』에 삽화를 그렸고, 그의 다른 작품을 위해서도 여러 점의 목판화를 제작했는데, 그것들이 1876년 4월에 출간되었습니다. 말라르메는 마네가 죽고 2년 후 “나는 10년 동안 거의 매일 소중한 마네를 보아왔다. 그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로서는 믿어지지 않는다”고 적었습니다. 말라르메는 그해 롤랭 대학 영어 교수가 되었는데, 마네가 재학했던 학교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