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티, 훈련의 힘으로 대가를 능가하게 된다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1404-72)는 “예술에 대한 견습은 이성과 방법으로 익히는 것이며, 훈련의 힘으로 대가를 능가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알베르티가 말한 대로 레오나르도는 이성과 훈련을 통해 스승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를 능가할 수 있는 경지로 나아갔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피렌체 출신의 화가로 관념적 전통 회화를 극복하여 입체감과 실재감을 표현하는 기법을 창시하여 중세 미술을 종말에 이르게 한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1267년경-1337)를 존경했습니다. 조토는 시골에서 혼자 외롭게 성장하면서 눈앞에 있는 대상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그린을 그렸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조토에 대해 “그는 자연으로부터 자신의 예술로 나아갔다”, “그는 당대의 화가들만 능가한 것이 아니라 이전 세기의 많은 화가들을 능가했다”, “조토는 스승 치마부에의 작품을 모방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고 적었습니다.

조토는 서양회화에 새로운 지평을 연 인물로 평가받는데, 비잔틴 회화 양식으로부터 새로운 이상, 즉 자연주의와 회화적 공간을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조토의 친구 단테는 『신곡』에서 조토가 스승 치마부에를 능가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1400년경 첸니노 첸니니는 “조토가 회화 예술을 그리스어로부터 라틴어로 바꾸어놓았다”고 적었습니다. 조토의 이전 작품은 전해오지 않고 파도바의 아레나 예배당에 프레스코를 그린 후부터 그의 독특한 양식이 나타났습니다. 이 예배당은 엔리코 스크로베니가 악명 높은 고리대금업자인 아버지의 죄를 사함받기 위해 건립했습니다. 1305-06년경 조토는 이곳에 오른쪽 방향으로 성서의 에피소드를 연결시켜 그렸습니다. 여기에 <최후의 심판>이 포함되고 성상 안치소 아치 위에는 <수태고지>가 있습니다. 그는 도덕적으로 교훈을 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조토는 화가로 유명했지만, 건축에도 조예가 깊어 1334년에는 피렌체 대성당의 건축가로 선임되었습니다. 그의 타계 후에도 그의 양식은 피렌체 회화에 크게 기여했으며, 레오나르도 외에도 마사초와 미켈란젤로 등 많은 화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과거 대가의 작품을 단지 모방하는 것으로는 대가를 능가할 수 없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갖고 있었습니다. 중세의 화가와 조각가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사람들을 교육하는 목적으로 작품을 제작했지만, 이런 식으로 정해진 형상을 좇아 반복하는 것이 그에게는 재능을 낭비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조토가 처음으로 대가를 모방하는 전통을 깨뜨린 사실을 이해했으며, 조토 이후의 화가들이 새로운 발견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의 작품을 모방함으로써 회화의 질이 저하됐다고 보았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마사초 이전까지만 해도 화가들이 자연보다는 대가를 모델로 삼아 작업함으로써 무모한 데에 온 힘을 쏟았다”고 말했습니다. 또 “화가가 다른 사람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게 되면 작품은 평범하게 된다”고도 했습니다. 그는 최초로 스승의 작품을 모방하는 대신 자연의 연구를 내세워 이론적으로 정리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오래 전에 이뤄진 사고로 전통에 대한 자연주의와 합리주의의 승리를 강도 높게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연구를 기초로 성립된 그의 예술론은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에 큰 변화가 생겼음을 알게 해줍니다. 미술이 수공업적 정신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선행되어야 했던 건 낡은 교육 체제의 변혁과 길드에 의한 교육 독점의 지양이었습니다. 이제는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 교육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입니다.


086

베로키오와 레오나르도의 합작, <규범을 위한 습작 (혹은 큐피드와 님프)>, 14.7-25.8cm.


베로키오에게는 개척자의 정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했으며, 이성적·과학적 방법으로 작업하면서 제자들도 자신과 같은 방법으로 작업하게 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로부터 배운 건 과학이었습니다. 과학적으로 관망하고 대상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초기 콰트로첸토quattrocento(15세기)에서도 이미 도제들에게 손으로 하는 일과 병행해서 기하학, 원근법, 해부학의 초보적 지식이 교수되었고, 실재 모델을 정확하게 스케치하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과학적 예술관은 알베르티로부터 비롯했습니다. 광범위한 지식과 합리적이고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진 알베르티는 전형적인 초기 인문주의자였습니다. 건축가, 조각가, 화가 그리고 작가인 알베르티는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이론가입니다. 1404년 제노바에서 망명 중이던 작가인 피렌체 상인의 사생아로 태어나 파도바와 볼로냐에서 교육을 받았고, 라틴어에 정통했습니다. 스물네 살 때 피렌체로 가서 당시의 유명 예술가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기베르티, 마사초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는 승마에 뛰어났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철학자, 수학자, 공학가이기도 했습니다. 1432-64년까지 교황청에서 서기관 직을 맡았고, 철학, 과학, 고전, 예술 등 각 분야를 골고루 탐구하면서 윤리학, 사랑, 종교, 사회학, 법학, 수학, 자연과학의 여러 분야에 관한 논문과 소책자를 펴냈습니다. 1436년에 첫 이론서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회화론』을 출간했고, 『조각론』은 1464년 직전에 완성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가 디자인한 건물들 중에는 만토바의 산 안드레아와 산 세바스티아노 성당이 있으며, 피렌체 대성당과 루첼라이 궁전의 외관을 장식했습니다. 그는 화가와 조각가로서도 활약했지만 현존하는 건 없고 1450년경에 제작한 것으로 추측되는 자화상을 기념 명판으로 제작한 것이 두 점 있습니다.


007

조르조 바사리의 <자화상>, 1566-68, 패널에 유채, 100.5-80cm.


알베르티는 처음으로 수학이 예술과 학문의 공통적인 근본이라고 주장했는데, 비례론과 원근법 이론이 모두 수학에 속하는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알베르티의 논술에 근본적으로 새로운 생각을 덧붙이지 않았고 단지 선배 화가의 주장을 더욱 강조하고 확대했을 뿐입니다. 레오나르도는 “과학이 명장이고 군인을 훈련시킨다”고 보았고 “훈련에만 집착하고 과학이 없으면 조종 장치나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선원과도 같아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결코 알지 못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바사리에 의하면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는 자연으로부터 드로잉하는 걸 배울 때 근사치는 용납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특정한 모델 앞에서 작업하면서 석고를 뜰 때 손, 발, 다리, 몸통을 모델과 똑같이 떠야 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드로잉한 우미한 주름들을 보면 실제처럼 정확하게 묘사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094

레오나르도의 <정면을 바라보며 서 있는 인물의 우미한 주름, 습작>, 린넨에 브라운 잉크, 28.2-15.8cm.


099

레오나르도의 <앉아 있는 사람의 우미한 주름, 습작>, 린넨에 회색 템페라, 26.6-23.3c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