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치노의 인문주의



당시 미술품 수집가로 변신한 코시모 데 메디치가 경제와 정치 외에도 문학, 학문, 철학, 예술에 관심을 기울인 건 이탈리아에 행운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코시모는 지성인이었고 예술에 대한 훌륭한 취향이 있었으며 라틴어에 능통했고 수박 겉핥기였지만 그리스어, 히브리어, 아라비아어를 익혔습니다. 그는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1387-1455)의 신실한 신앙을 표현한 그림, 기베르티의 고전양식의 부조, 도나텔로의 조각, 근대 건축 양식의 선구자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 on Battista Alberti(1404-72)의 고상함, 브루넬레스키의 장려한 성당,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Giovanni Pico della Mirandola(1463-94)와 이탈리아의 지도적 플라톤주의 철학자 피치노Marsilio Ficino(1433-99)의 신비적 플라토니즘 등을 좋아했으며 그들 모두를 후원했습니다.


법학과 철학을 수업하고 신비철학적 설교로 그리스도교 신학을 보강한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는 1486년에 『인간의 존엄에 관하여 De hominis dignitate oratio』를 발표한 뒤 교황청으로부터 이단자로 몰려 프랑스로 망명했습니다. 플라톤과 그의 후계자들의 저서를 라틴어로 번역, 주해하는 데 노력한 피치노는 이 사업을 위해 메디치 가의 경제적 후원을 받았으며, 1462년 이후 그의 칼리지는 ‘피렌체 아카데미’라 호칭되었으며, 그는 그곳에서 연구, 강의했습니다. 그는 플라톤철학과 신플라톤적 사상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보강하는 데 불가결하다고 주장하고 그리스도교의 우위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종교도 신에 접근하려는 인간의 본성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논했습니다.


코시모는 자녀들에게 고대 그리스 문학과 언어를 배우게 하고 자신은 피치노로부터 12년 동안 그리스어와 로마어를 배웠습니다. 그는 그리스와 알렉산드리아에서 고전문헌을 수집했으며, 인문주의자 니콜로 데 니콜리Niccolo de Niccoli(1364-1437)가 고대 사본 구입에 정열을 모두 쏟을 때 코시모는 그에게 메디치 은행으로부터 무제한으로 돈을 가져다 구입할 수 있게 했습니다. 1437년 니콜리가 사망했을 때 그가 사본을 구입하는 데 쓴 돈이 6천 플로린(약 150,000달러)에 달했으며 갚지 못한 돈도 어느 정도 되었습니다. 코시모는 마흔다섯 명의 필사자들을 고용해 자신이 살 수 없는 사본들에 대해서는 필사하게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수집한 것들을 산 마르코 수도원과 피솔레 수도원에 보관하거나 자신의 도서관에 소장하고 자신이 수집한 사본들을 교사나 학생들에게 무료 열람하게 해주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에 의해서 이 시기 인문주의자들의 관심은 종교에서 철학으로, 천상에서 지상에 대한 관심으로 돌려지고 예술에 관한 이교도의 풍부한 사고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헌을 통해서 인체의 아름다움, 인간의 모든 즐거움과 고통, 유혹에 약한 이성의 권위 등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문주의입니다. 1445년 코시모는 플라톤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플라톤을 연구하게 했으며 피치노로 하여금 플라톤의 저작을 번역하게 했습니다.


피렌체에서 의사의 장남으로 태어나 그곳과 피사에서 의학, 철학을 수학한 피치노는 플라톤 아카데미의 학장이 되었습니다. 이 아카데미는 플라톤에게 바쳐진 학문의 전당으로 고대 플라톤주의와 중세 가톨릭 신앙을 철학의 범주에서 새롭게 종합하여 당대의 철학적 사고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플라톤과 플로티누스의 저작을 라틴어로 번역한 피치노는 플라톤의 학설과 가톨릭의 신학이 일치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들을 읽는 가운데 플라톤의 철학에 매료된 것 같았습니다.


르네상스에 와서 예술에 대한 인식이 한층 고양된 것은 플라톤과 플로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를 받아들인 피치노 때문입니다. 그가 쓴 플라톤의 저작에 대한 주석과 플로티누스의 번역으로 인해 고대와 중세, 그리고 르네상스의 연관이 회복되었으며, 이는 예술의 발전을 위해서도 성과 있는 일이었습니다. 피코 델라 미란돌라는 그의 영향을 받아 플라톤의 저작 번역을 마친 후 플로티누스의 『에네아데스 Enneades』를 번역했습니다.


피치노는 상상력을 감각에 의한 표현을 조화시키는 능력으로 보고 환상을 미적 지각의 문제에 대해 판단하는 능력으로 간주했습니다. 사람이 묵상하는 가운데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플라톤이 말하는 형상들에 대한 순수한 이성적 의식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이때 영혼이 미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는 미가 낮은 수준의 감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성적 능력에 의해 포착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됩니다. 피치노에 의해서 미술이 매우 고상한 예술로 격상된 사실은 특기할 만합니다.


피치노는 1469년 플라톤의 『향연 Symposion』에 대한 주석을 썼으며, 『영혼 불멸에 관한 플라톤의 신학 Theologia Platonica de Immortalitate Animarum』을 1484년에 출간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과 피타고라스의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영혼불멸설이 현저하게 나타났습니다. 제목이 시사하는 대로 그 책은 플라톤 철학과 가톨릭 신학의 일치에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영혼불멸에 대한 그의 논증은 플라톤과 플로티누스 및 그 외의 신플라톤주의자들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이 한데 섞인 것입니다. 그는 1484년부터 플로티누스에 관한 번역과 주석을 쓰기 시작하여 1492년에 발간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신플라톤주의뿐 아니라 중세의 신비사상과도 부분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사유를 통해 영혼이 더욱 심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은 그는 사유의 삶이 영혼으로 하여금 항상 더 고상한 수준의 진리와 존재로 상승하게 하며, 종국에는 일시적으로 신의 비전과 지식 안에서 절정에 달하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식의 상승이란 신비주의에서 절대존재와 일체를 이루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신을 향한 영혼의 상승은 지성과 의지라는 두 가지의 도움으로 달성됩니다. 신에 대한 지식은 신에 대한 에로스를 수반하며 궁극적인 비전은 즐거움의 행위를 수반합니다. 피치노는 『영혼 불멸에 관한 플라톤의 신학』에서 대부분 영혼의 불멸에 관해 논했으며 영혼불멸설에 대한 옹호의 논증을 플라톤, 플로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많은 가톨릭 신학자들의 사상에서 빌려왔습니다. 그의 논증은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한 당대 인문주의자들의 형이상학적 노력의 일환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영혼불멸사상은 당대 예술가들에게 직접 영향을 끼쳐 육체의 아름다운 표현을 통해 불멸하는 신의 광휘를 갈구하게 했습니다. 특히 르네상스 전성기의 미켈란젤로에게 이것이 예술적 신념이 되어 이같은 정신을 작품에 구현하게 했습니다.


피치노는 자연을 미 혹은 선의 작품으로 보고 선과 자연이 일치하는 데 사람의 영혼이 매개적 존재로 등장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이는 르네상스를 특징짓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개념의 철학적 표명이기도 합니다. 영혼이 매개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육체는 땅에서 왔지만 영혼은 하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신성을 지녔으므로 마땅히 불멸성을 지니며 인간의 존엄성 또한 존중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피치노는 영혼의 불멸을 인식의 문제라기보다는 의지의 문제로 보고 플라톤의 에로스 개념을 가톨릭의 자비나 사랑과 동일한 개념으로 간주하여 심리적 요소와 신학적 요소가 융합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적 사랑 amor Platonicus’이란 말을 만들어 플라톤이 묘사한 정신적인 사랑, 혹은 그 자신이 말한 신적 사랑을 의미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플라토닉 러브’란 말을 피치노가 처음 사용했습니다.


정신에는 이데아가 있고, 영혼에는 이성이 있으며, 자연에는 영혼이 생성될 수 있는 씨앗Semina이 있고, 질료에는 형상이 있으며, 미의 원리가 되는 선은 모든 미적 사물들의 원인이 됩니다. 사람은 자연에서 선의 특색을 어렴풋이나마 인식하게 되고 자연의 힘, 즉 자연에 내재한 미에서 선의 위력을 어림할 수 있으며, 이런 자연의 유용성에서 선을 볼 수 있습니다. 자연미는 선의 광휘로서 변화의 현상을 나타내지만 그 자체는 불변합니다. 자연미는 형이상학적 실재의 미가 지닌 형상의 반영으로 완전한 미는 아닙니다. 이와 같은 피치노의 사랑과 미에 대한 사고가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정신에 내재한 추상적 형상을 질료로 구현하게 했으며, 그들은 그렇게 하는 데서 형상의 구체성이 드러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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