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공통점과 차이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광야에서 기도하는 성 제롬>의 부분, 1478-8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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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로마 피에타>의 부분, 1498-99년
위의 두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개성을 잔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로테스크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보여주려고 한 레오나르도는 광야에서 종교적 시련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제롬의 고난을 신앙의 승리로 보기보다는 거룩한 체험에 지친 혼으로 표현했습니다. 성자에 대한 허상의 이미지를 배척하고 성자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고뇌의 늪에서는 지친 모습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미켈란젤로에게는 레오나르도와 달리 현실에 대한 통찰력이 없었습니다. 그는 명상을 통해 환영의 세계를 관조하면서 최상의 즐거움을 종교적 희열에 두었습니다. 현실은 오히려 그에게 걸림돌이 되었고, 지고의 신앙에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기쁨을 표현하는 작업을 통해 그 자신 천국에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으므로 그의 작품은 이러한 신앙의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과 차이를 지적하자면 우선 레오나르도는 정신보다는 물질이 근본이라고 생각한 유물론자이며 미래가 아주 밝다고 본 낙천주의자였습니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이상주의자로 물질을 하찮게 여기고 물질에 앞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형상이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정신만을 귀히 여겼으므로 매우 진지했고, 고독한 사람이었으며,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갖지 않은 사람들을 경멸했습니다. 이러한 본질적 상이함이 두 사람의 작품에서 나타납니다. 미켈란젤로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체를 통해 순수하고 영원한 영혼의 모습을 관람자가 볼 수 있기 바란 데 반해 레오나르도는 그로테스크한 인간의 모습을 다양하게 표현함으로써 여러 종류의 인간들이 사는 세계를 관람자에게 확인시켜 주려고 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현실주의자라면 미켈란젤로는 환영에 사로잡힌 현실도피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레오나르도에게는 사물을 바라보는 통찰력이 있었으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전통적 도상이나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지식과 믿음을 배척하고 논리적, 분석적인 새로운 해석과 판단을 통해 과거의 오류에 대한 반성을 요구했습니다. 그는 전통적 도상을 무시했고, 야만시대의 종말과 이성시대가 열리는 역사적 분기점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당대의 신학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철학과 문학의 요람에서 교육을 받은 미켈란젤로는 당대에도 난해한 단테의 『신곡』을 해설할 수 있을 정도로 박식했지만, 오늘날의 지성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학문에 치우친 협소한 시각을 가졌습니다. 일찍이 그는 시각적 현상과 기교에 있어 독보적인 면을 과시했지만, 내용에서는 전통을 존중했습니다. <로마 피에타>를 예로 들면 대리석을 밀가루반죽 다루듯 쉽게 옷자락의 우미한 주름을 사실주의 방법으로 표현했으며, 아들을 잃은 슬픔에도 불구하고 신의 어머니이자 딸로서 품위를 지키는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청순하고 우아한 자태로 표현하는 놀라운 기교를 시위했지만, 당대의 신학을 충실히 따른 것에 불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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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그로테스크한 남자의 옆모습>, 38.2-27.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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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델피의 무녀>의 부분, 1508-12년
미켈란젤로는 인체와 영혼에만 집착했을 뿐 그 밖의 것들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나, 레오나르도는 목욕탕의 구조와 도시계획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위한 복지에 관련된 모든 분야에 골고루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인체의 형태를 알기 위해 인체해부를 했지만, 레오나르도는 생리학적 관점에서 인체의 구조와 기능을 알기 위해 해부하고 심근경색 등 각종 질병의 원인을 밝혀냈습니다.
현실주의자인 레오나르도는 멋진 옷을 입고 오늘날의 고급 스포츠카에 해당하는 값비싼 말을 타고 다녔습니다. 손수 악기를 만들고 작곡과 연주를 하면서 풍류를 즐겼습니다. 그는 인생을 즐겁게 살기를 바랐고, 물질이 주는 풍요로움을 즐겼습니다. 그와 달리 중세적인 도덕관에 젖어 있던 미켈란젤로는 명성이 드높아 많은 돈을 벌었지만, 물질이 주는 풍요로움에 빠지는 것을 죄로 여기고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상류사회에 접근하여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미켈란젤로는 현세의 안락보다는 내세의 영생을 소망했으므로 일찍이 자신이 속한 상류사회를 벗어났습니다. 그는 거의 아흔 해를 사는 장수의 복을 누렸지만, 인생이 길어지는 것을 오히려 죄를 더 많이 짓게 되는 요인으로 보고 스스로 염세주의의 짐을 졌습니다. 그의 삶은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삶과 같았습니다.
두 사람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레오나르도는 미래의 사람이고 미켈란젤로는 과거에 속한 사람입니다. 레오나르도의 언행에는 경박함이 있었지만 유쾌한 사람이었고 비관적인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노력으로 개척했습니다. 또한 그는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해 발명가로서 분주한 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인체를 기계에 비유하여 사용하지 않을 경우 녹이 슨다고 생각했으므로 늙어서도 끊임없이 드로잉하고 자신의 생각을 많은 글로 남겼습니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과거 철학자와 신학자의 사상에 심취하여 언행에 신중을 기했고 많은 작업을 피하고 자신이 맡은 작업에는 완벽을 기하려고 전력을 투구했습니다. 그는 고상한 생각을 정해놓고 작업했으므로 늘 작품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근심이 많고 우울했으며 자책하며 스스로를 괴롭혔습니다. 지나치게 형이상학을 신뢰한 그가 나중에 신비주의에 빠지고 만 건 어쩌면 당연해보입니다.
두 사람 모두 독신으로 생을 마쳤고 동성연애자로 알려졌습니다. 동성애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폭넓게 이뤄졌습니다. 발랄한 성격의 레오나르도는 동성애로 기소당한 적이 있고, 주변에 잘생긴 젊은이들이 있었으며, 그는 그들과 여해하기를 좋아했습니다. 행동에 앞서 사고하는 기질의 미켈란젤로도 동성애자로 알려졌지만, 확증할 단서가 될 만한 행동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그의 삶은 닫혀 있었고, 가문과 자신에 관하여 말하기를 꺼려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엄청난 양의 글을 남겼으며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며 열린 사람을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은 구체적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반해 미켈란젤로는 편지와 시를 많이 남겼어도 그것들이 철학적 내용이라서 그의 정신세계를 아는 데는 훌륭한 자료가 되지만, 구체적인 생활상은 알려져 있지 않아 후세 사람들에게 궁금증으로 남아 있습니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스물셋 살이나 되다보니 레오나르도가 왕성하게 활동할 때 미켈란젤로는 아직 미술계에 발을 내딛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피렌체에서 인정받지 못한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피렌체에 돌아와 잠기 머문 적은 있지만 말년을 프랑스에서 보내고 그곳에 뼈를 묻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와 로마에서 주로 활동했으므로 두 사람의 삶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겹치는 때가 별로 없어 두 사람을 한 환경 속에 두고 이야기를 구성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레오나르도에 관한 이야기가 전반에 다뤄지고 그의 사망 후 미켈란젤로의 남은 45년 동안의 활약상이 소개될 것입니다.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두 거장이 공존하여 유럽 전역에 두 개의 산자락으로 미술의 지형을 바꾼 건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독보적인 존재로서 한 사람만 존재하는 것보다는 두 거인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 역사에 유익합니다. 르네상스 미술운동은 이탈리아의 부흥에 그치지 않고 유럽 전역으로 이어졌으며, 두 사람은 사양미술의 패러다임이 되어 500년 이상 존속했습니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활약을 통해 르네상스의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