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어떤 건 아름답게, 어떤 건 추하게 지각할까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새나 아름다운 꽃을 볼 때면 나는 지적 설계를 믿어요. 정말로 이러한 아름다움 이면에 어떠한 사상이나 목적도 없다고 없나요? 무작위적인 세상이라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존재할 수 있죠?”
그 사람의 말은 아름다움이 오직 창조주의 설계에 의해서만 나올 수 있다는 만연된 가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즉 ‘무작위’와 ‘우연’은 설계가 되지 못했을 경우의 이야기이며, 그것은 창조주이 없는 오직 혼돈과 추함으로만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우연히 나타나는 게 아니고 의식적이며 의도적 설계에 의해서 존재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아름다움과 창조주를 연결합니다. 그들은 미의 본질을 검토하지 않습니다.
왜 어떤 건 아름답게 느껴지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을까요?
왜 우리는 어떤 건 아름답게, 어떤 건 추하게 지각할까요?
왜 잡초나 멧돼지는 추하다고 생각하고 장미와 토끼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아름다움이 장미나 토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 있다는 생각은 왜 하지 않는 걸까요?
중요한 건 그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바로 진화과정의 산물인 것입니다.
투우사가 소 앞에서 붉은 천을 흔들며 소를 사나워지게 만듭니다. 하지만 소는 색맹입니다. 세상을 흑백으로만 볼 뿐이지. 개도 마찬가지입니다. 흰 눈이 내리면 개들이 이리저리 뛰는데, 사람처럼 즐거워서 뛰는 게 아니라 검은 세상이 희색으로 덮이기 때문입니다. 갓 난 얘들도 세상을 흑백으로 바라봅니다. 갓 난 얘들의 모빌을 흑백으로 만든 건 그래서입니다. 인간의 조상도 세상을 흑백으로만 바라보았답니다. 지금 우리가 컬러로 바라보는 건 우리가 세상을 컬러로 채색했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잘 안 되지요? 컬러로 바라보는 것이 진화과정의 산물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은 원래 흑백입니다.
아름다움의 대한 감각도 진화과정의 산물입니다. 요즘은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다양해져서 돼지, 뱀, 쥐를 애안용으로 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아름다움의 대상은 보통사람보다 폭이 넓습니다. 대상에는 아름다운 본질이 내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이 그것들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눈에 변화가 오면, 즉 지각에 변화가 오면 과거에 아름답지 않다고 하는 것들도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런 변화가 예술에선 흔합니다. 예술가들의 지각은 시대에 따라 보통사람보다 빨리 달라집니다. 또 그래야 예술가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쥐에 대한 인식을 월터 디즈니가 바꾸어놓았습니다. 그의 만화 영화에선 쥐가 여간 귀엽지 않습니다. ‘탐 앤 제리’에서도 쥐는 명석하기만 합니다.
아름다운 것이 지적 설계의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건 오류입니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따로 없습니다. 우리가 구분할 따름입니다.
(사진은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