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토마 쿠튀르의 영향에서 벗어난 마네


마네는 말했습니다.

역사적인 장면을 재현하다니,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야! 중요한 점은 이것이야. 첫눈에 본 것을 그리는 것, 잘 되면 만족하고 잘 안 되면 다시 그리는 거지. 나머지는 죄다 엉터리 짓이야.


마네의 스승 토마 쿠튀르는 역사화 화가였습니다. 역사의 사건을 주제로 그렸습니다. 화가들은 역사적 장면을 그릴 때 당대의 의상이나 건물 내부를 문헌을 통해 연구하여 모델에게 당대의 의상을 입히고 화실 내부에 당대의 오브제를 놓거나 시대에 맞게 분위기를 만들어 그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대규모일 때는 성당이나 보다 큰 곳에 인공적으로 배경을 만듭니다. 그리고 모델을 하나씩 혹은 둘씩 그려서 나중에 전체 그림에 삽입합니다. 그러나 일부 화가들의 역사화에선 역사적으로 실증되지 않은 의상이나 내부의 장면을 보게 됩니다. 우리나라 TV 사극에서 의상이나 건물의 외부와 내부가 고증되지 않은 채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역사의 한 장면을 그린다는 건 둘 중 하나입니다. 신고전주의이거나 낭만주의입니다. 신고전주의 화가들은 후세에 교육이 될 만한 조국애라든가 영웅담 같은 사건을 주로 그렸습니다. 예를 들면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에서처럼 조국을 위해 결연한 자세로 삼형제가 아버지를 떠나는 장면 같은 것 말입니다. 또는 많은 인명의 피해를 남겼지만, 전쟁에 승리하는 장면입니다. 반면 낭만주의 화가들은 과거의 아름다운 장면에 집착합니다. 예를 들면 노트르담의 꼽추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기사나 왕이 가난한 여인에게 무릎을 꿇고 청혼하는 이야기입니다. 낭만주의는 현 시대가 암울할수록 성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거가 그리워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낭만주의 드라마, 예를 들면 부잣집 딸이 가난한 집 아들과 사랑에 빠지는 전형적인 로맨틱 스토리가 바로 낭만주의의 전형입니다. 낭만주의 드라마가 인기가 있다는 말은 그만큼 오늘날의 사회가 억압적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현재가 암울하기 때문에 과거의 신분을 뛰어넘는 인간적 스토리에 열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네는 스승의 역사화에서 더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1856년 봄부터 그의 화실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스승의 회화론을 의심하고 비판할 만큼 성숙해진 것입니다.


마네는 화실을 세 얻어 네 살 연상의 화가 알베르 드 발레로아와 함께 사용했는데, 발레로아는 정장차림에 예의를 갖춘 나무랄 데 없는 신사였습니다. 동물과 사냥장면을 주로 그린 그와 화실을 나눠 사용한 건 화실 세를 절약하는 효과도 있었지만, 이미 미술계에 입지를 마련하고 친구를 많이 둔 그가 미술계 진출에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해 마네는 <갈대를 든 그리스도>와 <괭이를 든 그리스도>를 그렸는데, 커다랗게 그릴 <그리스도와 막달린>을 위한 부분적인 그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마네는 명목상으로만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가 평생 5백 점도 더 되는 그림을 그렸지만 기독교를 주제로 한 그림은 불과 여섯 점이며 이들 중 다섯 점이 그리스도를 주제로 한 것이며,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라든가 전통적인 형식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묘사한 것은 없습니다.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미술읽기'로 가면 볼 수 있습니다. 혹은 misulmun49)

마네의 <그리스도와 천사들 Les Anges au Tombeau du Christ>, 1864, 유화, 179.5-150cm.



마네는 1863년 쿠튀르에게 “천사들과 함께 죽어가는 그리스도를 그리려고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마네는 코펜하겐 뮤지엄에 소장된 만테냐의 <피에타 Pieta>를 보고 영감을 얻어 이 그림을 그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네가 이 작품을 1864년의 살롱에 출품하려고 했을 때 시인 샤를 보들레르가 이 작품을 칭찬하면서 그리스도의 가슴에 난 창에 찔린 자국이 오른쪽보다는 왼쪽에 있는 것이 더 낫다는 의견을 편지에 적어 보냈지만, 편지가 늦게 도달해 수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이 그림을 수채화로 다시 그릴 때는 좌우를 반전시킨 형태로 그리면서 창에 찔린 자국이 왼쪽으로 가게 했습니다.



마네는 1865년에는 <군인들에게 조롱당하는 예수>를 그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그린다는 말로 사실주의 미학을 주장했는데, <그리스도와 천사들>은 귀스타브 쿠르베에게 비난의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한 번도 천사를 “본 적이 없는 천사”를 마네가 어떻게 확신에 차서 자세히 묘사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마네의 친구 에드가 드가가 쿠르베에 반박하며 마네를 옹호했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람. <그리스도와 천사들>에는 다른 것은 몰라도 훌륭한 소묘가 있는데. 여기를 보라구. 속이 내비치는 이 푸른색을 말이야. 마네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야.

소설가 외에도 평론가로 활약한 에밀 졸라도 칭찬에 합류했습니다.

나는 배경에 있는 천사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커다란 푸른 날개를 달고 있는 아이들은 얼마나 매력적이고 부드러운가.


마네가 남몰래 없애버린 캔버스가 더이상 없었다면 1858년까지 2년 넘도록 그린 그림은 모두 12점이며 그중에 5점이 모사화들로 그가 자신의 독창적인 그림을 그리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네는 1856년부터 1859년까지 루브르 뮤지엄에서 틴토레토, 디에고 벨라스케스, 피터 폴 루벤스의 회화를 모사하면서 대가들의 양식을 익히는 데 전력했습니다. 평생 우정을 나눈 팡탱-라투르와 드가를 만난 곳도 루브르에서였습니다. 마네는 루브르 뮤지엄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면서 처음에는 스페인 화가 고야의 극적인 장면, 적나라한 사람들의 모습, 검정색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익혔고 나중에는 벨라스케스의 초상화에 매료되어 그들의 양식을 익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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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압생트 마시는 사람 The Absinthe Drinker>, 1858-59, 유화, 181-106cm.

이 작품의 모델은 당시 잘 알려진 유대인 모델로 마네의 수첩에 그의 주소가 적혀 있었습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메니프 Menippus>, 1636-40, 유화, 179-94cm.

마네의 <거지 철학자 Beggar (the Philosopher)>, 판화



마네가 그린 <압생트 마시는 사람>은 17세기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ignez de Silva Velazquez(1599-1660)의 <메니프>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때 그린 그림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그림입니다. 마네는 친구 프루스트에게 벨라스케스로부터 발견한 단순화시키는 기교를 사용해서 파리장의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공언한 적이 있었는데 이 작품에서 그의 의도가 충분히 표현되었습니다. 마네는 바닥에 술병을 그려 관람자에게 모델이 독한 압생트에 중독된 자임을 강조했으며,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레몬껍질과도 같은 밝은 노란색으로 그림의 분위기를 강렬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6년 이상 그를 가르쳐온 토마 쿠튀르에게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그림이었습니다. 쿠튀르는 “압생트 마시는 사람은 바로 이 그림을 그린 장본인이다”라고 혹평했습니다.


마네도 지지 않고 프루스트에게 “내가 그의 방식대로 그림을 그린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었다. 난 어리석게도 그의 공식대로 그림을 그려왔다. 이젠 끝이다! 그가 한 말은 자기의 회화에나 어울리는 말이다. 그로 인해 나는 이제 내 두 발로 설 것이다”라고 강한 의지를 나타냈습니다. 마네는 쿠튀르의 화실을 떠난 후에도 스승을 방문하며 자신의 그림에 관한 고견을 청취하곤 했으나 더이상 그로부터 인정받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마네가 <압생트 마시는 사람>을 1859년 살롱에 출품했을 때 심사위원의 한 사람이었던 외젠 들라크루아의 옹호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반대로 낙선되었습니다. 하지만 마네에게는 첫 성공작이었습니다. 주정뱅이를 그린 그림은 교육적인 목적을 중요하게 여기는 심사위원들의 심기를 건드렸겠지만 대충 문지른 듯한 붓질과 자유로운 소묘는 갈고 닦은 솜씨임에 분명했습니다.


마네는 1860년 두아이 가에 화실을 얻고 바티뇰 불바드에 아파트를 얻었습니다. 바티뇰은 생라자르 역 북쪽에 있는 동네로 1861년 파리 시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부모와 함께 살았고 아파트에는 수잔과 그의 아들 레옹이 살고 있었습니다. 레옹은 여덟 살이 되었는데, 성을 마네로 하지 못하고 레엔호프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마네는 아직도 아들의 존재를 알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오귀스트는 1857년 10월에 마비 현상을 일으켰고, 13개월 후에는 다리를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조금 나아졌지만 말은 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수잔과의 관계를 말하지 못해 레옹을 호적에 올리지 못했습니다. 수잔은 레옹을 자신의 남동생이라고 속이고 키우고 있었습니다. 레옹이 자신의 성이 레엔호프가 아니라 마네란 사실을 안 건 그가 스무 살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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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수잔 마네의 모습

사진: 레옹 레엔호프의 모습

마네의 <소년과 검 Boy with a Sword>, 1861, 유화, 131-93.5cm.

이 작품의 소년이 마네의 아들 레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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