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종교적 확신에 찼을 때 가장 완벽하고 적극적으로 악을 행한다
『양복을 입은 원시인 Caveman Logic』(2010, 도서출판 知와 사랑)의 저자 행크 데이비스Hank Davis는 어렸을 적 그를 혼란스럽게 한 건 부모님들의 믿음이 아니라 텔레비전이나 친구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이었다고 회상한다.
“나는 항상 신이 추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가령 하늘의 영혼처럼 말이에요.”
당시 그가 ‘추상적’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건 분명하지만, 그가 의미하는 바는 그것이었다고 술회한다. 그는 신이 우리가 이해할 수도 그럴 수도 없는 어떤 사상 같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고, 저 위에 있는 존재라고 믿었기 때문에 굳이 그 형상을 상상해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에게 기도를 드리는 건 괜찮지만, 그가 개인사에 개입하거나 총알을 막아줄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왜 다른 사람들은 그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하죠? 큰 힘을 가진 나이 든 부자 삼촌을 대하듯 말에요. 그에게 잘 보이고 필요한 게 있을 때마다 부탁을 드리잖아요. 그건 그다지 종교적인 것 같지 않은데요.”
아이들이 산타클로스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면 어른들은 그걸 인정한다. 누구도 신화로 남기려고 애쓰지 않는다. 하지만 신의 문제에서는 좀 다르다. 아이들이 신에 대해 존경하는 혹은 믿음을 확인하는 말을 할 때 그들의 부모님은 경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교사들도 그것을 인정한다. 신부, 목사, 랍비들도 그러하다. 즉 이러한 이야기는 어른들의 지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행크 데이비스가 어머니에게 “왜 신을 묘사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누군가인 것처럼 말하는 거죠?” 하고 물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사람들은 그런 식의 신을 더 좋아한단다” 하고 말해주었다. 어머니는 그에게 “그게 신의 본질이니까” 하고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대답은 오직 사람들이 신을 그런 식으로 필요로 하고 그들이 원하는 식으로 신을 설계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어린 행크 데이비스는 사람들이 신을 자신들의 삶에 위로가 되는 방식으로 그린다는 걸 알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신을 바라보고 설명하는 방식은 상당히 다양할 것이다. 어느 면을 보든 그는 본질적으로 인간과 비슷하다. 어쩜 영화배우 찰튼 헤스턴을 닮았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대개 파악이나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한 정형성이 뭔가를 말해준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애걸하고, 거래하며, 간청한다. 이는 우리가 능숙하게 사용하는 기술이다. 심지어 이것은 진화적으로 준비된 것이기도 하다. 행크 데이비스는 규칙이 단순하다면서 첫째, 자신이 가진 권력의 한계를 파악하고, 둘째, 누가 더 많은 권력을 갖고 있는지 알아내며, 셋째, 결과를 최대화하기 위해 그들과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그 전략을 버릴 수 없다는 걸 깨달으면서 이러한 정신적 규칙들의 유용성은 분명해진다. 우리는 성인이 되어서도 중요한 사건들에 대한 권력을 모두 가질 수 없으며 한때 모든 권력의 원천이었던 부모님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가 원하는 걸 애걸해도 부모님은 우리의 건강이나 학교와 직장에서의 성공, 대인관계를 통제해줄 수 없다. 나쁜 일들은 계속해서 생긴다. 그리고 원시 논리가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나는 아니지만 분명 누군가는 이러한 사건들을 통제할 권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바깥에 권력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제껏 알아낸 바로는 우리가 뭔가를 원할 때 지갑을 열어주는 사람이 있었고, 우리는 애원하고 간청하여 결과를 바꿀 수 있었다. 왜 어른이 된다고 해서 달라져야 하는가? 우주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다시 생각하기보다는 우리는 그와 같은 오래된 회로를 유지하고 원하는 걸 들어주는 전지전능한 부모 같은 존재를 상상하는 쪽을 택하고 그와 개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것은 세 가지 행동, 즉 애걸과 거래와 간청으로 나타나는데, 물론 우리는 그것을 ‘기도’라고 부른다. 하지만 근본 규칙과 기대는 같다. 그런 행동에 위안을 받고 익숙함을 느끼기 때문에 의구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스스로의 행동을 점검한다 해도 이 사회에는 우리의 생각이 옳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 있다. 바로 교회에서 우리 옆에 나란히 무릎 꿇고 있는 타인이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옆의 사람도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면 이제 공식적 허가를 받은 셈이다.
행크 데이비스는 진화에서 비롯된 성향과 어린 시절의 경험이 혼합되고, 게다가 우리는 원래 종교 믿음과 의식에 잘 빠지는 종이라고 말한다. 종교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온기를 주고 평화와 형제애로 우리를 다스려주는 것이라면, 이런 종교의 불가피성은 축하해야 할 일이지만, 그들의 고귀한 목적에도 불구하고 조직화된 종교는 평화와 형제애의 원천으로 보이지 않는다. 파스칼의 말대로 “사람은 종교적 확신에 찼을 때 가장 완벽하고 적극적으로 악을 행한다.” 점점 커져가는 테러리스트의 공격, 제노사이드, 집단 간 증오의 확산은 그 소리 없는 경고이다. 이것이 몇몇 극단주의자들이나 특정 ‘나쁜’ 종교의 탓일까? 그렇지 않다. 이는 새로운 문제도 아니다. 원래 “내 신이 너의 신보다 낫다.” “개종과 죽음 중 하나를 선택하라.” 이런 식의 만트라mantra는 조직화된 종교의 근원적 부분이다. 데이비드 베러비가 저서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Us and Them』에서 주장했듯이 내 집단과 외 집단의 구성원을 규정하는 건 인간 본성이다. 이런 인간 본성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홍적세Pleistocene(지질시대 신생대 제4기의 전반의 세로 플라이스토세, 갱신세, 최신세라고도 한다. 인류의 조상이 나타난 시기를 말한다) 성향을 넘어설 때까지 문화, 종교 간의 갈등과 유혈사태를 계속하여 부추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