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공양왕, 고려의 최후의 왕



오늘은 소문난 일산칼국수집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근처에 있는 공양왕릉을 찾았습니다.


고려 34대 왕이자 최후의 왕인 공양왕(1345-94)의 이름 요(瑤). 신종(神宗)의 7대손이며,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균(鈞)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비(妃)는 창성군(昌城君) 진(稹)의 딸 순비(順妃) 노씨(盧氏)였습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원(元)나라에서 명(明)나라로 바뀔 때였으므로, 조정에서는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의 대립이 격심했습니다.

친명파의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뒤에 창왕(昌王)을 즉위하게 하였으나, 음모를 꾀했다는 이유로 창왕을 폐위시키고, 1389년에 공양왕을 즉위시켰습니다.

공양왕은 과단성이 없는 성품으로 정몽주(鄭夢周)를 중심으로 한 구세력(舊勢力)에 이어 새로 실권을 잡은 이성계에게 완전히 실권을 빼앗겼다가, 정몽주가 살해된 후 덕이 없고 어리석다는 이유로 1392년에 폐위되었습니다.

이로써 고려는 34대 475년 만에 망했습니다.

공양왕은 폐위된 뒤 원주(原州)에 추방되어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다가 2년 뒤에 삼척(三陟)에서 살해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공양왕릉이 두 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삼척시 근덕면(近德面) 궁촌리(宮村里)에 있는 것으로 1995년 9월 18일 강원도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곳의 묘지는 모두 4기의 무덤으로 구성되었는데, 가장 남쪽에 있는 것이 공양왕의 무덤이고 2기는 왕자의 무덤, 나머지 1기는 왕의 시녀 또는 왕이 타던 말의 무덤으로 전해옵니다.

제가 간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도 공양왕릉이 있습니다.

이처럼 두 곳이 거론되는 이유는 공양왕의 재위 시기가 조선 건국과 맞물려 있어 문헌이 빈약하므로 정확한 고증이 어려운 까닭이라고 합니다.

1662년(현종 3) 삼척부사 허목(許穆)이 편찬한 《척주지(陟州誌)》와 1855년(철종 6) 김구혁(金九赫)이 쓴 《척주선생안(陟州先生案)》에는 삼척에 있는 것이 공양왕릉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척 궁촌(宮村)에서는 3년마다 어룡제(漁龍祭)를 지내는데, 그에 앞서 반드시 공양왕릉 앞에서 먼저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남아 있습니다.

사적 제191호인 원당동의 공양왕릉은 왕과 왕비를 쌍릉(雙陵)형식으로 합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진짜 공양왕릉인지 모른다는 건 매우 웃기는 일입니다.

제가 찾은 공양왕릉이 진짜인지 아닌지 아무도 모르지만, 사적 제191호입니다.

사적으로 지정되었다면, 당연히 문화재로서 보호해야 마땅합니다.

헌데 나무로 울타리만 쳤을 뿐 거의 방치된 상태입니다.


구세력을 대표하는 정몽주와 신세력을 대표하는 이성계의 틈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었던 공양왕은 허수아비로 4년을 재위하다 폐위된 후에는 살해되었습니다.

공양왕에서 공양군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사후에 공양왕이란 칭호를 되찾았습니다.

고려는 이런 수모 끝에 왕건이 나라를 세운 지 475년 만에 이성계에 의해 국운이 다했습니다.

비록 역사는 그러했더라도 고려의 마지막 왕릉이 두 개 존재할 정도로 전설만 있고 문헌에 기록이 없다는 건 비극입니다.

원당동에 있는 것이 진짜 왕릉일지도 모를 터인데, 그래서 사적 제191호로 지정했다면, 묘지 주변을 가꾸어야 하고 풍상에 파헤쳐진 묘지를 바로 정비해야 마땅합니다.

왕비 손씨의 일가 무덤도 그곳에 있는데, 보기에 흉할 정도로 묘지가 파헤쳐져 있으며 풀이 없이 흙이 드러나 있습니다.

더 방치했다간 묘지가 평편해지고 말 것입니다.

문화재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이런 정도라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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