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본다

 

45억 년이나 되는 지구라는 우주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별에 사는 우리는 누구일까 생각해 본다.

상상하기조차 오랜 지구에서 우리 조상이 농경사회를 건설한 건 겨우 1만 년 전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우리 조상은 무리를 지어 다니며 수렵하고 먹거리를 채취하며 살았다.

그저 살아남는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리는 가족 단위였고 아무리 많아야 150명 미만이었다고 한다.

무리 중에서 우리 조상은 짝짓기를 했다.

근친결혼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고릴라와 침팬지와 그리 다른 생활은 한 것이 아니다.

수백만 년 동안 우리 조상은 굶주림과 포식자의 위협, 그리고 질병에 노출되어 왔다.

수렵-채취 집단 남성의 여덟 중 하나가 이러한 생존의 투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이는 20세기 전쟁의 사망률인 100명 중 하나와 비교하면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인간이 개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죽음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투쟁은 치열하다.

얼마 전 용산참사에서 보듯 권력이 있고 재물을 쌓아놓은 놈이야 아무 걱정이 없지만, 그날 벌어서 그날을 사는 사람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는 위협은 곧장 죽음의 노출로 이어진다.

21세기에 살면서도 우리는 100명 중 하나가 생존을 유지하지 못하고 죽어가야 할까?

힘없는 사람은 권력자와 부자의 손에 목숨을 잃어야 할까?

수백만 년 동안 이러한 생존투쟁이 지속된다면 우리가 자랑하는 문명이란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인디언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마음속에 두 마리의 늑대를 키우고 있다고 한다.

하나는 사랑의 늑대이고 다른 하나는 미움의 늑대이다.

우리는 두 마리의 늑대와 함께 살 수밖에 없다.

우리가 매일 어느 늑대에게 먹이를 주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사랑 속에 살 수 있고, 또한 미움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살게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원숭이가 상대방 원숭이를 위해 털 고르기를 하는 시간이 하루의 1/6이라고 한다.

그런데 상대방의 털 고르기를 하는 놈이 털 고르기를 받는 놈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사랑을 베푸는 것이 미워하는 것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는 것이다.




어제 일본과 우리나라 축구 평가전을 보면서 시합 전 관중석에서 이순신 장군과 안중근 의사의 대형 사진이 올라가는 걸 보고 경악했다.

일본 축구팀을 우리나라에서 초청해 평가전을 치루면서 어떻게 반일감정을 그런 식으로 표명할 수 있을까 대단히 경악했다.

일본팀을 반드시 이기려는 것은 매우 타당한 바램이다.

그러나 스포츠를 하면서 반일감정을 표출하는 건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일본 축구선수와 일본에서 시합을 바라보는 대부분의 일본인은 이순신 장군과 안중근 의사와는 상관이 없다.

그들의 조상과 그들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가 우리나라를 침략한 것이지, 오늘날의 일본인이 그러한 범죄를 우리에게 저지른 것이 아니다.

역사를 기억하고 다시는 침략당하지 않으려고 국력을 키우는 건 바람직하지만, 그 후손을 미워하는 건 우리에게는 스트레스가 쌓이는 일이다.

역사 교과서 문제라든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우리나라 원폭 피해자, 위안부 그리고 그 밖의 역사 처리문제에서는 반일감정을 드러내야 한다.

필요하다면 일본대사관 앞에 가서 시위도 해야 하고, 국제 여론도 일으켜야 한다. 

그렇지만 축구시합에서 그런 식으로 반일감정을 표출하는 건 매우 어리석은 일일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다.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스포츠는 정당한 시합을 통해 이겨야 하는 것이다.




미움의 늑대가 펄펄 살아서 날뛰는 동안 우리 인류는 21세기에도 100명 당 한 명의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생존의 위협은 미움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미움은 스트레스를 자초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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