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경한 초선 의원에 대한 영접 경쟁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신파와 구파는 무소속과 중도파 의원들에 대한 포섭에 혈안이 되었다. 포섭 경쟁의 막은 서울역에서부터 올랐다.
당시는 승용차가 드문 때여서 초선 의원들 대부분이 열차 편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신파와 구파는 이런 점을 노리고 서울역에 나가 정중한 당선축하와 마중인사로 자파가 미리 정해 놓은 호텔에 안내하며 표 낚기 작전을 폈다.
이 같은 경쟁은 도가 지나쳐서 수원까지 마중 나가 열차에서 납치 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실로 한심스러운 작태였다.
8월 7일은 민주당의 의원총회를 열기로 한 날이었지만, 구파는 분당을 선언한 처지였고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겸점을 목표로 모든 전략을 23인위원회에 일임했으므로 합동의원총회에는 불참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신파가 구차스러운 형식론과 명분론으로 당론을 유도하려고 하니 구태여 여기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태도였다.
의원총회는 열릴 전망이 없는 가운데 8월 6일 신파와 구파는 각기 파별로 당선자대회를 개최했다.
구파가 소집한 아서원 대회에는 민의원 74명, 공천 탈락자들 가운데 당선자 9명, 참의원 12명 총 95명이 참석했고, 신파의 대명관 대회에는 민의원 68명, 공천 탈락자들 가운데 당선자 5명, 무공천지구 당선자 2명, 참의원 10명으로 총 85명이 참석했다.
이 같은 참석자들의 수로 봐서는 구파가 우세한 것 같았지만, 사정에 의해 불참을 통고한 수는 구파가 3명, 신파가 12명, 국무총리를 인준하는 민의원 의석은 신파가 87명, 구파가 86명으로 신파가 1명 더 우세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의원들 가운데는 본의 아니게 억지로 끌려나와 타파의 대회에 참석했다가 뒤늦게 구파의 회장에 참석한 최경식 의원 같은 이도 있었기 때문에 양파의 우열을 가름하기는 어려웠다.
문제는 무소속과 군소 정당 출신 의원들의 향배에 따라 판가름 날 수밖에 없었다.
당초 8월 15일 국회를 소집하여 원을 구성할 예정이었으나, 허정 수반의 조기 개원 요청을 받아들여 8월 8일 제5대 민의원과 초대 참의원이 개원되었다.
이제 의장단 선거에서 일단 신파와 구파의 세 우열이 나타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