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의 키슬러는 입버릇처럼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생전의 키슬러는 입버릇처럼 “내가 했던 작업은 전부 1920년대 초 빈에서 구상한 일련의 작품에 적용된 ‘엔드리스’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후의 작업들은 그것을 구체화하기 위한 노력에 불과하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엔드리스’ 개념을 좀더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다양한 테마를 설정하고 각각에 대한 해법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작업이 다양한 영역에 걸쳐 전개된 원인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결과 우리는 그의 독자적인 개념인 ‘엔드리스’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920년대에 최초의 발상을 보인 엔드리스는 애초에 극장안(案)의 하나로 발표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주요개념 중 하나인 엔드리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보여준 극장설계 및 무대디자인에 관한 작업을 면밀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먼저 키슬러에게 ‘1920년대’는 어떠한 것이었는지 살펴보자.
1. 1920년대의 빈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활약했던 음악도시 빈은 예로부터 도나우강을 주된 루트로 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수려한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빈은 로마 제국이 유럽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하던 때부터 군대와 상인의 거점인 국제적 도시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유럽의 다른 도시보다 비교적 빠른 시기에 이질적인 문화가 공존하는 개방적인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다.
또한 합스부르크 가계가 지배했던 제국의 수도로 정치경제의 중심지인 동시에 문화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유럽 근대음악의 유명한 작곡가들 중에서 비인에서 작품을 발표하지 않은 인물의 이름을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앞서 언급한 모차르트와 베토벤 외에도 하이든, 베버, 슈베르트, 바그너, 리스트 등이 빈을 무대로 활동했다.
이같이 빈에서 음악이 발전했던 이유로 왕궁과 귀족 등 상류계급의 비호가 있었다는 평범한 이유 외에도, 서민들의 음악애호풍습이 그 배경에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식탁음악’이라는 것으로부터 오늘날의 대중음악과 흡사한 종류의 음악이 빈 시내의 카페에서 연주되곤 했다.
카페가 비인 시민에게 중요한 사교의 장이 된 것은 1683년 이후이다.
카페는 상류계급에 의해 조직된 살롱보다 손쉽고도 자유로운 정보교환이 가능했다.
런던에서는 이보다 빠른 1650년대에 이미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술집 경영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각지에서 유행한 ‘다방(Coffee House)’이 그것이다.
다방도 자유로운 정보교환 센터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영국 시민문화의 발생을 재촉했다고 말해진다.
뿐만 아니라 런던의 다방에서 오늘날의 신문이 탄생했다고 하니, 결국 다방이 대중사회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탄생시킨 일등공신인 셈이다.
다방과 카페의 발생은 유럽 주요도시에 새롭게 등장한 시민계급의 대두와도 무관하지 않다.
시민계급은 이전까지 상류계급이 보유하고 있던 극장, 미술관, 콘서트 홀 등의 문화시설을 점거해가면서 문화적 주체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곧 시민계급에 의해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