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슬러는 이러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한편 당시의 빈에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요술피리>의 각본가로 유명한 극장 지배인인 시카네이더2)와 그 밖의 몇몇 사람들이 시민계급의 취향에 맞는 공연기획자로 활약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음악과 연극을 결합한 오페라나 오페레타를 보기 위해 시민들이 극장을 자주 찾았는데, 그들은 <요술피리>의 상연에서도 모차르트의 음악보다는 화려한 무대장치와 연출에 더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
빈의 극장에서는 전통적으로 르네상스 연극의 주된 특징인 스펙터클한 무대장치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연극의 주류였던 코메디아(comedia)의 스토리가 관객을 압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흥으로 행해졌던 인터메조(intermezzo)에 인기가 집중되어 주객이 전도되는 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이것은 오늘날의 텔레비전에서 심각한 다큐멘터리나 사회 드라마보다는 그저 웃고 떠드는 버라이어티 쇼가 높은 시청률을 보이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연극을 좋아했던 비인 시민의 취향에 관해서는 빈 태생의 소설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회상록 『어제의 세계』1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그는 이 책에서 빈 시민들이 조간신문에서 제일 먼저 보는 것은 정치나 경제면이 아니라 연극계의 동향을 전하는 뉴스였다는 등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근대도시 빈의 시민사회에서는 카페나 극장이 커뮤니케이션의 장(場) 역할을 하고 있었다.
키슬러는 이러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또한 키슬러는 법률가였던 부친에게 세익스피어극을 읽어 달라고 조르곤 했다고 하는데, 그가 연극 및 극장공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 같은 성장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키슬러는 비인 공과대학(Wiener Technischen Hochschule)에서 건축을 공부한 후 미술 아카데미(Akademie der Bildenden Kunste)에 입학하여 오늘날의 그래픽디자인에 해당하는 회화 및 인쇄술과정을 전공했다.
당시 빈에는 세기말 건축의 대부 오토 바그너가 왕성한 활동을 했던 시기로, 1910년대에는 그의 대표적인 건축물들이 시내 곳곳에 들어서기도 했다.
유명한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의 <분리파 전시관 Ausstellungsgeb둼de der Secession>이 칼스플라츠에 건설되기도 했다.
또한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에 속하는 아돌프 루스와 요제프 호프만도 활동하고 있었다.
키슬러는 루스 및 호프만과도 교류가 있었는데3), 그는 토마스 H. 크레이톤과의 대담4)에서 그들의 건축관에 대해 소개하면서 자신은 그들과 다소 다른 의견을 갖고 있음을 피력했다.
“당시(1910년대) 빈에는 두 가지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호프만이 지도하고 있었던 미술공예학교가 주도했던 것으로, 주로 수공예의 부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류였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경향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이며 독특한 개성을 지닌 건축가 루스와의 대립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루스는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당시의 건축에는 장식이 너무 과도하다고 생각하여 기능적인 또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그것은 하나의 ‘죄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루스는 호프만이 학생들에게 ‘근대’의 추억에 연연하는 비더마이어(Biedermeier)5)를 교육하고 있다고 격렬하게 비난했지요.
그는 기능보다는 장식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이유에서 오스트리아가 전쟁(제1차 세계대전)에서 지고 말 것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2
루스는 1908년에 유명한 『장식과 죄악』이라는 저서를 발표했는데, 일종의 선언과도 같은 성격을 띠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 어느 시대에도 시대를 대표하는 특유의 양식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 시대만 양식이 거부된 채로 있어도 되는 것인가?
이 같은 우려에서 사람들은 우리 시대의 양식창출을 위해 새로운 장식을 생각해내고자 고심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충고하노니 실망하지 마라!
왜냐하면 새로운 양식을 탄생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위대함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장식을 넘어선 것이다.
우리들의 무장식은 진보를 의미한다.”3
“낙후된 사고를 가진 자들이 국민과 인류의 문화적 발전을 늦추고 있다.
장식은 범죄자들에 의해 탄생된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건강에 유해하며 국가의 경제력을 저하시키고, 나아가서 문화적 발전을 저해하는 일종의 범죄행위에 속한다.”4
“만약 무장식이 보편화된다면-몇 천 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인간은 8시간이 아니라 4시간만 일하면 될 것이다.
장식은 노동력의 낭비이고, 따라서 건강의 낭비이며, 재료의 낭비임과 동시에 자본의 낭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역사상 장식을 의식하지 않았던 시대는 없다.”
루스는 미국 체제 중에 만난 루이 H. 설리번의 사상을 옛 유럽의 중심이며 바로크의 도시인 비인에서 보다 급진적인 것으로 발전시켰다.
루스의 사상은 바우하우스가 지향했던 기능주의의 기저가 되는 탈장식성의 길을 여는 계기가 됐다.
또한 1912년 헤르바르트 발던이 유명한 ‘데 슈투름(Der Sturm) 화랑’과 동명의 잡지를 통하여 독일에 미래파를 소개한 바 있는데, 여기에 루스는 다섯 개의 에세이를 기고했다.
이것은 루스의 친구인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추천에 의한 것이다.
키슬러는 사상적으로는 루스의 영향을 받아 장식의 무의미함과 사회적 관점에 근거하는 민중건축의 개념에 가까워진다.6)
당시의 비인에는 후에 20세기의 지적 세계를 지배한 것으로 평가되는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이 모였던 곳이 카페였다.
루스가 설계한 <무제움>이나 호프만이 설계한 <크렘젤나 임페리얼>등이 그것이며, 조금 북쪽에 있는 <센트럴 카페>에서는 당시 유행하던 체스 경기가 매일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의 챔피언으로는 레닌과 프로이드의 제자 아들러, 소설가 칼 크라우스, 루스, 오스카 코코슈카, 쇤베르크, 알반 베르그, 안톤 폰 월베른 등이 있었고, <무제움>에는 프란츠 레할, 오스카 스트라우스 등과 그 밖에도 젊은 예술가와 건축가가 모여 있었다.
키슬러는 이처럼 활발한 지적 교류가 행해졌던 시대적 지역적 특성 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