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키슬러의 무대디자인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키슬러가 뉴욕의 쥴리어드 음악원의 무대디자인 총책임자로 일하게 시작한 것은 1934년이다.20)
이후 키슬러는 쥴리어드 음악원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위하여 많은 무대디자인을 담당했는데, 무대장치의 디자인뿐만 아니라 의상과 가면디자인 등도 다루었다.
마샤 그래험 무용단의 무대장치에 이사무 노구치의 조각을 응용하기도 했다.
무대디자인 작업을 거치면서 그의 작품세계는 점점 환상적인 상징성을 띠기 시작한다.
무대디자인은 테마의 표현에 있어서도, 연출효과라는 측면에 있어서도 상징성을 띠고 있다.
줄리어드 음악원에서의 첫 번째 작업에 해당하는 조지 안텔 작곡 <헬렌 은퇴하다!>의 무대디자인에서 이미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곡선을 이용한 유기적 형태의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1940년경부터 유럽에서 망명해온 초현실주의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하는데, 1942년 ‘금세기 예술’ 화랑에서 개최된 초현실주의 전람회의 전시 공간 설계에도 극장공간에서 체득한 경험을 적극 반영하고 있다.
한편 1948년 다리우스 미요 작곡, 장 콕도 각본 <애처로운 수부>의 무대디자인에서 키슬러는 척추와 두개골, 또는 날카로운 이빨이 있는 구강을 연상시키는 목조의 입체적인 장치를 제작했다.
애초에 무대장치로 제작된 이것은 배우의 출입이 가능할 정도로 큰 것이어서 오브제의 내부공간까지도 연출대상공간이 된다.
후에 이 입체적 구조물은 무대장치의 부분이 아니라 <갤럭시>라는 이름의 조각작품으로 자립한다.
이 작품에는 인간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있었다.
이 같은 사실에 주목한 키슬러는 이 작품을 ‘환경조각’이라고 이름 짓는다.
물론 키슬러의 무대장치 전부가 조각작품으로 탈바꿈한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우리는 생애를 통한 자신의 작업에 일관성을 부여해온 키슬러다운 면모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무대디자인을 통한 극장공간에 대한 구조적 실험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1946년에 상연된 사르트르의 <출구 없음>의 무대디자인에 몰두하고 있던 키슬러는 ‘시인의 극장’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언급했다.
‘시인의 극장’이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시인은 지난 역사상 각 시대나 지역에 따라 나름의 방법을 통해서 무대공간의 문제와 관련되어왔다.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로 떠들썩한 오늘날 우리는 다시 한 번 ‘시인’의 음성을 필요로 한다.19
‘시인의 극장’을 위해서는 구어적인 표현을 소화할 수 있는 무대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적절한 연극적 장치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복잡한 의미를 지닌다.
먼저 극장의 구석구석까지 대사가 명확하게 들리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으로 연기자가 단순히 야단스러운 움직임을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최상의 표현력을 지니는 높은 수준의 시각적인 조형성을 완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관객과 연기자 사이의 물리적 관계가 직접 결합되는 것을 허용할 것인지, 또는 양자를 분명하게 분리시킬 것인지를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프로세니엄 아치가 없어진 무대라고 할지라도 그것 대신에 커튼이라는 가리개가 존재한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지금 우리는 이 점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20
키슬러는 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장식을 배제한 추상적인 무대를 구상했다.
이 같은 방법은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 극장의 리바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오손 웰스의 <율리우스 시저>에서 이미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같이 아무것도 장식하지 않는 무대디자인은 극적 표현 가능성이 감소될 수밖에 없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 키슬러는 <출구 없음>에서 어떠한 방법을 채택했는지 알아보자.
1시간 30분간 상연되는 <출구 없음>에는 등장인물이 3명에 불과하다.
배우는 연기하는 동안, 특히 옆으로 서거나 뒤로 돌아서 있을 때 대사가 관객에게 확실히 들리는지 어떤지를 우려한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의식해서는 연기자도 연출가도 만족할 수 있는 연기나 연출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나는 우선 모든 연기가 위로 치켜 올려진 플랫폼에서 행해질 수 있도록 무대의 바닥전체를 2피트 높게 설계했다.
조금이기는 하지만 전방을 향하여 확실히 알 수 있을 정도의 경사를 만든다면 무대 전체가 음향확성기와 같은 기능을 하게 되며, 또한 움직이는 연기자의 모습이 부조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평상시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자의 모습이 풋 라이트(Foot Light)의 후드(hood)와 평평한 무대바닥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경우를 종종 겪는다.
그러나 후드와 무대바닥이 연기자들에 의해 포위된 무대의 연기 공간 전부를 느끼고자 하는 관객에게 방해요인으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
움직임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위치와 이에 따라 창조되는 공간의 양상을 디자인하는 행위야말로 무대의 극적 표현을 증대시키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특히 소수의 연기자들 간의 상호작용을 꾀하고자 하는 경우에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