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슬러다운 아이디어가 또 하나 있다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그림을 주시하는 사람을 위해 얼굴 앞에 타원형의 프레임을 놓아두는 것이다.
이 프레임도 그림의 형태에 따라 상하좌우로 움직일 수 있게 설계되었다.
그림으로부터 액자를 떼어내는 대신에 감상자에게 프레임을 부여하고, 이것으로 관객은 그림과 1:1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전장에서 논고한 사르트르의 <출구 없음>(1946)에서 시도한 ‘시인의 무대’와 맥락을 같이하는 발상이다.

프레임에 관한 발상 중 하나로 옥외에 놓여진 작품을 감상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는 흥미로운 스케치가 있다.
‘들여다보기’ 위한 원통형 창의 디자인과 작품의 세부를 보기 위한 망원경이 그것이다.
그런데 위의 그림 오른쪽에 있는 평면도를 보면 옥외에 놓여진 작품은 사람이 들어갈 수 없도록 에워싸여 있다.
왜 키슬러가 이 같은 조건의 전시방법을 생각했을까?
이 스케치를 본 순간 나는 후에 마르셀 뒤샹이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설치한 유작 <주어진 상태>14)와 같은 ‘엿보기 장치’ 가 떠올랐다.
키슬러와 뒤샹이 절친한 친구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뒤샹이 1942년에 뉴욕에 도착한 후 얼마동안 7번가 56번지에 있는 키슬러의 아파트에서 같이 생활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또한 키슬러는 뒤샹의 <대형 유리>, 일명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벌거벗겨긴 신부조차도>(1915-1923)에 대해 1937년 잡지 『아키텍추얼 레코드』(1937년 5월호 p.53-60)에 발표한 ‘디자인 상호관련’에 관한 일련의 논문에서 직접 다룬 적이 있다.15)
‘금세기 예술’화랑이 개관한 1942년 이 화랑의 기획 중에는 여기에 언급된 ‘엿보기 장치’와 관계있는 작품의 전시가 있었다.
하나는 뒤샹의 <가방상자> 복제품을 전시한 것인데, 회전벨트를 이용해 감상자에게 작품을 연속적으로 보여주는 전시방법을 채용하고 있었다.
또 하나의 ‘엿보기 장치’는 앙드레 브르통의 <배우 A, B의 초상>이 전시된 ‘어두운 상자’를 위한 것으로, 키슬러가 고안한 개폐가 자유로운 조리개가 달려 있었다.
키슬러의 ‘공간전시’개념이 환경적 경향을 띠며 확대되었다고 한다면, ‘엿보기 장치’를 이용한 전시는 폐쇄된 어두운 상자형 무대와도 같은 경향을 띠며 발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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