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갤럭시’의 발전
키슬러는 1940년대 말부터 54년에 걸쳐 제작된 갤럭시 시리즈를 통해 화가와 조각가로서의 명성을 쌓게 된다.
물론 그가 구상한 건축에도 회화적 표현이나 조각가로서의 성격이 이미 내포되어 있었다.
아마도 키슬러는 환경예술가10)로서 보다 넓은 영역에 걸쳐 자유자재로 활동해왔다고 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최종적으로 갤럭시는 금속그물을 구부려서 가능한 각체 구조 위에 시멘트를 발라 보다 튼튼한 장력을 지닌 유니트를 공간상에 연속적으로 배치하는 ‘엔드리스 조각’으로 진전된다.
<말의 ‘갤럭시’>가 벽면에 패널을 배치하여 기존의 벽면이 지니는 공간적 문맥을 해체시켰다면, ‘엔드리스 조각’은 천장, 벽, 바닥이라고 하는 기호화한 실내공간을 연속되는 조각공간으로 변환시킨다.
‘엔드리스 조각’은 애초에 <엔드리스 하우스> 모형제작에 사용된 적이 있는 금속 그물을 베이스로한 구조체를 조각품의 유니트에 사용한 것이다.
키슬러는 건축을 위한 유니트와 조각의 유니트를 구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며, 건축은 곧 조각이며 반대의 개념도 성립될 수 있다는 것에 아무런 모순도 느끼지 않았다.
키슬러는 만년에 이르러 갤럭시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엔드리스 조각’이나 ‘갤럭시 회화’의 개념이 일반적인 내부 장식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모든 유니트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데 있다.
커튼이나 벽화 등과 같이 모든 것이 서로 전혀 무관하게 흩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엔드리스 조각’은 그것이 놓인 환경과 밀착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되는 연속체에의 의지에 따라 고정된 것으로부터 불연속적으로 성장을 지속하는 지구적인 유기체를 구성한다.16
금세기에 들어서 회화와 조각은 여전히 2차원의 캔버스 위에 3차원 또는 4차원의 환상을 표현하는 데 머물러 있다.
인물과 나무 또는 하늘과 땅 사이의 실제공간에서 경험한 사실을 단지 재수집하는 것이다.
허구의 세계를 창출하는 것을 통해 화가는 마치 신처럼 행동한다.
마치 이카루스와 같이. 아직도 회화는 이 같은 원칙을 기준으로 하며, 그것의 다양함을 존속시키고 있을 뿐이다.
네덜란드의 초상화가 얼굴주름이나 커튼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묘사하는 것과, 몬드리안이 완전히 추상적인 비대상 그림을 그리는 것의 차이점은 단지 스타일이나 패션의 문제에 불과하다.17
내가 제작한 몇몇 유니트의 회화, 다시 말하면 갤럭시는 각각 다른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것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의 환상을 그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 자체를 만들어내려는 의지의 결과이다.
갤럭시는 하나의 회화를 연속되는 몇 가지 이미지로 나눈다.
그 결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밑에서 위로, 안에서 밖으로, 어떤 방향에서라도 볼 수 있게 된다.
이들 유니트를 연계시키는 힘은 원근법과 같은 구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 자신에게 있다.
감상자들은 화랑에서 멈추어 서거나 빙빙 돌아다니며 그림을 볼 것이고, 그림을 집 안에 들여놓은 수집가라면 팔걸이의자에 앉아 석간신문을 보면서 쳐다보게 될 것이다.
어떤 형태로 감상하든지 그들은 ‘상호관련’의 한 요소이다.18
이 같은 갤럭시와 가까운 개념에 기초한 예로 한스 아르프의 부조작품을 들 수 있다.
아르프는 몇 개의 부정형을 편편한 받침대 위에 무작위로 배열했다.
아르프는 부정형을 의식적으로 배치하지 않고 우연하게 배치했으나, 결과는 부정형한 형태가 보이지 않는 힘의 작용을 통해 연계되었다.
예술에 있어서 우연과 필연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루치오 폰타나도 불규칙적인 형태의 캔버스를 벽면 위에 그룹으로 구성한 적이 있는데, 키슬러와 같이 그도 벽면에 각기 다른 간격을 두고 구성했다.
폰타나도 일찍부터 일련의 ‘공간주의’11)선언문을 통해 공간을 직접적 표현매체로 의식하는 환경적인 경향을 나타내는 작품을 제작한 적이 있다.
그의 작품에도 타원형의 캔버스를 사용한 것이 있는가 하면 세라믹을 이용한 달걀형의 조각작품도 있다.
폰타나는 의외로 키슬러의 갤럭시와 비슷한 사상을 지닌 작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