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미술을 위한 건축
키슬러는 건축가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역할을 스스로가 점검하면서, 예술가가 지니는 ‘확신’과 같은 것이 건축가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대한 해답으로 건축가는 ‘상호관련’에 의거한 무엇인가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가 바토스와 함께 ‘월드 하우스’화랑의 설계를 시작했을 때 다음과 같은 전제조건이 있었다.
먼저 그곳에 어떤 그림이 진열될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현대적인 작품일 것이라는 추측만 가능했을 뿐이다.
두 번째로 디자인 형식에 대해서 아무런 주문도 없었다.
세 번째로 그들에게는 남아 돌 정도로 충분한 비용이 있었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상태였다.
이 화랑의 주인이었던 허버트 메이어는 세계 모든 나라 예술가의 작품을 매년 바꾸어 전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은 키슬러와 바토스의 고민을 해소해주지 못했다.
그들은 이것이 단순한 시장인지, 미술관인지, 개인소장품을 일반에게 공개하기 위한 것인지,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일반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계층을 지칭하는지, 그리고 유지비와 투자의 균형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미술의 장르별 배분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알 수 없었다.
이 같은 문제점 때문에 키슬러와 바토스는 이 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신중하게 고려했다.
그러나 망설이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결국 다음과 같은 결정이 내려졌다.
먼저 특수한 화랑이 아니면서도 의뢰자에게도, 예술가들에게, 특히 키슬러와 바토스에게 새로운 타입의 것을 디자인하는 것.
그리고 키슬러와 바토스가 이 새로운 개념의 아이디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설계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은 제대로 대접받고 있지 못하다.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는 지나칠 정도로 많은 시간을 쏟아 부은 데 반해, 예술을 발전시키는 데는 너무도 짧은 시간밖에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스스로가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예술가가 되어버린 인간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은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persona non grata)’인 것이다.
이같이 특수한 유형의 인간이라는 오명을 감수하면서 그들은 예술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있다.
키슬러는 예술가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고발하고, 예술작품이 미술시장의 판매대상이 되어 화랑을 통해 수집가의 집에 옮겨지고, 그 수집가가 이사를 하면 작품의 주소가 변경되고, 결과적으로 작품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본래 있어야 할 안주의 땅을 찾지 못하는 현실을 우울해 했으며 예술의 운명은 마치 떠도는 유태인의 숙명과도 같다고 비유하기도 했다.
오늘날 화랑의 역할은 이합집산의 상태에 빠져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작품에게 짧은 시간이나마 휴식처를 제공하고, 특히 화랑을 찾는 관람자와 작품 사이의 만남을 주선한다는 의미에 중점을 두고 기획되어야 한다는 것이 키슬러의 주장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혹성의 시스템과 같아야 하며, 양자 사이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이 해방되어 상호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스스로의 세계를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상호관련’의 찬스는 끝없는 연속성 속에서 형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곳에서는 우연한 일이 반복되지 않으면 안 된다.
첫눈에 반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일 것이다.7
여기서 주목할 점은 키슬러의 화랑설계는 건축적 이데올로기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보다는 현대사회에서 예술가가 놓여 있는 상황, 그리고 그들이 사회적으로 어떠한 취급을 받고 있는지에 주목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화랑이 존재하는 배경과 그 의미를 통해서 예술가의 사회적 위상을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예술가가 만들어내는 예술작품은 도대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오늘날과 같은 산업 우선주의와 시장경제 상황에서 예술작품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대상물인가?
단지 예술작품이 잘 팔린다는 것만으로 만족할 것인가?
안 팔리는 것보다는 잘 팔리는 것이 좋다고 해도, 팔린 작품들은 어떤 형태로 세상에 존재하는가?
키슬러는 스스로에게 이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환기시키고 이에 대한 답변을 통해 오늘날의 사회체계 속에서 예술가나 작품이 존재하는 방식을 생각했다.
이것은 비즈니스가 우선되는 뉴욕 예술계에서 ‘엔드리스’라는 개념을 오랜 동안 소중하게 발전시켜온 자신의 통렬한 체험의 산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뉴욕 예술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격렬한 비지니스의 와중에서 많은 작가와 작품은 어떤 운명을 겪는가.
그것을 지척에서 목격하고 그 동향을 비판적으로 파악하던 그의 입장이 이 에세이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자신도 유럽에서 건너온 유태인이었다.
비지니스가 전제된 예술작품의 모습을 보고 그가 겪어온 운명을 돌이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는 필자의 견해는 지나치게 주관적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키슬러가 이 ‘월드 하우스’라는 이름의 화랑을 설계하게 된 이유는 특정하게 정해져 있지 않은 예술작품과 그것을 보는 사람을 위한 만남의 장을 마련한다는 데 있었다.
게다가 만남이라는 것이 상품으로서의 미술작품과 그것을 판매하는 화랑과의 만남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방법을 취한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키슬러는 ‘상호관련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라고 설명한다.
건축가로의 임무는 작품과 관객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공간 설정, 그리고 그 결과 작품에 내재된 예술적 잠재력과 관객의 마음속에 있는 그것이 상호작용하는 장을 디자인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그가 평소에 주장한 ‘상호관련’의 방법론과 일치하는데, 이번에는 화랑공간이 그 대상으로 선택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