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슬러에게 있어서 <엔드리스 하우스>는 교회와 미술관 이상의 것이었다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르 코르뷔제는 그야말로 기적을 낳았다. 그가 생애를 통해 축조를 거듭해온 높고 낮은 사각형의 건축이라는 장화의 끈을 풀고 롱샹의 하늘을 향해 치솟은 건축7)을 세운 것이다.
르 코르뷔제에게 일어난 이 같은 이륙의 성공은 ‘대단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통해서 공간의 연속성을 거론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스타일이 혼합되어있다고 생각한다.
롱샹 교회는 티벳풍의 지붕과 몬드리안풍의 벽면, 그리고 탑처럼 보이는 두개의 사료저장고 등이 혼란스런 영혼의 모순을 상징하는 듯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건축의 본래 모습이라 할 수 있는 종교적 분위기를 잃지 않고 있다.18
라이트가 설계한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1956-1959)에 대해서도 키슬러는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그의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건축·조각인 -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의 설계를 의뢰받게 된다.
그러나 기구하게도 그는 건물 준공식 3개월 전에 세상을 등진다.
현대미술이라는 막강한 적을 상대로 그는 만족할 만한 전시가 가능한 가변식 전시공간을 연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커다란 실내공간은 방문자들이나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로 가득차면 생기를 띠게 된다.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관람자의 시야에 작품이 들어오지 않는 경우 관객들은 마치 언제나 다른 속도로 움직이게 설계되어 있는 조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생애를 표준화된 다양함으로 점철되고 있는 건축업계에 대한 반역으로 일관한 인물이다.
그는 언제나 개미처럼 올망졸망 모여 있는 건축가들을 짓밟는 공룡과 같은 주인공으로 존재해왔다.
라이트는 발코니를 이용해 연속적인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발코니의 리드미컬한 난간은 회화나 조각을 전시하기 위한 실질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공간 전체의 무한성은 회화나 조각에 대한 친밀감의 결핌을 잊게 해주며, 동시에 그것들을 용서하고 싶을 정도로 충분한 만족감을 주고 있다.19
두 거장이 만년에 제작한 두 작품을 통해 키슬러는 그들이 근대기능주의의 주된 조류를 넘어서서 마치 조각과도 같은 건축을 지향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키슬러는 그것들을 ‘입방체 감방’에서 벗어난 주요작품으로 평가했다.
단 이 두 작품은 모두 예술과 종교를 위해 헌정된 것으로 일상생활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지적했다.
키슬러 자신도 인류의 역사를 위한 건축 <바이블 성전>을 설계했고 일련의 환경조각도 발표했다.
그러나 그가 보다 강력하게 원한 것은 인간의 일상생활을 대상으로 하는 건축, 즉 <엔드리스 하우스>를 짓는 일이었다.
만약 사람들이 <엔드리스 하우스>를 감각에 의존하는 좁은 시각으로 보지 않고 전체상을 파악하고자 노력한다면 그것이 지극히 현실적인 주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시적 감성이 매일 일어나는 해프닝의 연속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라면 더욱이 현실적인 주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20
마지막으로 키슬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리하여 우리와 가까운 곳에 ‘인공적 우주’를 창조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단지 ‘살기 쉽게 하기 위한 장치’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대신에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각성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작용하고 있는 우주의 힘이 우리를 끊임없이 성장시켜 물질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무한하게 발전시켜줄 것이다.21
키슬러에게 있어서 <엔드리스 하우스>는 교회와 미술관 이상의 것이었다.
왜냐하면 종교도, 예술도 <엔드리스 하우스>에서의 생활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