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해사본』의 발견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옛부터 이스라엘에는 “글 쓰는 사람을 위한 기념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계율이 있었다.
그 때문에 고대 유태인의 유적으로 남아 있는 문헌은 거의 전무하다.
따라서 구약성경에 관한 고고학적 연구에는 문자로 남아 있는 자료의 발견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특히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성서의 원형이 어떠한 내용인가를 알기 위해서 고대성서의 사본 발견은 성서학자들의 오랜 꿈이기도 했다.2)
1947년 봄 고대 엣세네파(派)의 공동체가 살고 있었던 사해 근처의 크므랑 절벽에 있는 동굴에서 오늘날 『사해사본』이라 불리는 두루마리 책자가 발견되었다.
무하메드 애드 도르브라고 하는 문맹의 타아미레 아랍인 양치기 소년은 이 우연한 발견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도르브는 잃어버린 산양을 찾던 중 아무 생각 없이 들여다본 동굴에 돌을 던지자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소년은 다음날 사촌 아후메드 무하메드와 함께 그 동굴에 들어가 8개의 기다란 항아리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산양가죽에 문자를 적은 두루마리가 있었다.
이것이 『사해사본』을 발견한 경위이다.
소년은 이 두루마리를 평소에 알고 지내던 시리아인 상인 카일 이스칸델 샤인에게 건네준다.
샤인은 아무것도 모르고 구두수선에라도 사용할 요량으로 가져갔다고 하니, 자칫 잘못했으면 『사해사본』는 어떤 사람의 구두밑창이 될 뻔했다.
거기에 적힌 문자의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예루살렘 구(舊)시가지에 있는 성마르코 수도원의 대주교에게 4권의 두루마리를 건네주면서부터 두루마리의 중요성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1948년 2월 대주교는 이것을 예루살렘에 있는 아메리카 오리엔트 연구소에 가져가서 그곳 학자들과 같이 사진을 찍게 한 후 볼티모어의 존스 홉킨스 대학의 올브라이트 교수에게 보냈다.
3월 15일 “현대 최대의 사본발견을 축하한다”는 내용의 편지가 도착하여 이 발견은 진실의 세계에 동참하게 된다.
한편 동굴에서 발견된 7권 중 나머지 3권은 어떻게 되었는가?
1947년 11월 23일 헤브라이 대학의 고고학자 엘레아잘 수케닉에게 아랍인 골동품상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당시 팔레스티나는 영국의 위임통치를 끝내고 유태인 지역과 아랍인 지역으로 분할시키기 위한 국제연맹총회의 투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테러가 빈번한 상황 속에서 수케닉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아랍인 지역에 들어가 까다로운 매수(買收)교섭을 거쳐 나머지 3개의 두루마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연구를 시작한 11월 29일 국제연맹은 팔레스티나의 분할안(案)을 가결했다.
그러나 『사해사본』는 다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최종적으로 안주의 땅을 찾기까지 좀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한편 시리아 정교회 사무엘 대주교는 4권의 두루마리를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비싼 값으로 팔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학문적 자료라는 점에서는 사진 복제가 있으므로 이미 중요성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단지 역사적 자료라는 점만으로는 좀처럼 적당한 수집가를 만날 수 없었다.
1954년 6월 초 『월 스트리트 저널』지의 뉴욕판에 다음과 같은 공고가 났다.
그 밖의 매물. 『사해사본』 4권. 2,000년 전의 성서사본 판매. 개인 또는 단체가 교육 상 또는 종교상의 시설에 기부하기에 최적. 월 스트리트 저널 사서함 F206호.2
키슬러의 일기와 그 밖의 자료에 기술된 것과는 이후의 사실이 다소 다르게 적혀 있다.3)
건축설계를 담당한 키슬러의 일기에 의하면 이 광고 덕분에 뉴욕의 자선가 고테스만 기금(D. S. & R. H. Gottesman Foundation)의 대표 고테스만 부부가 이 두루마리를 구입해 1955년 3월 27일에 워싱턴의 이스라엘 영사관을 통해 이스라엘 정부에 기증했다고 적혀 있다.
이 두루마리를 소장하기 위한 <바이블 성전>의 설계가 키슬러와 바토스 팀에 의뢰된 이유는 고테스만의 딸이 바토스의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키슬러와 바토스는 뉴욕에서 텔아비브로 날아가 목하 건설 중인 예루살렘 대학을 향했다.
이 새 대학의 건설부지 안에 성전이 건설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