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해사본』에서 받은 각양각색의 상념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이 대형 돔 내부에서 관객의 동선(動線)은 도넛 모양의 보행공간에서 발생하는 회유식(回遊式)에 의존하고 있다.
나아가서 상하를 연결하는 두 개의 계단을 포함하는 3차원 회유동선(回遊動線)을 시도하고 있다.
이 원형 돔 내부에서 발생하는 관객의 움직임을 분석해보면, 초기의 아이디어인 <엔드리스 극장> 계획안(1923)과 <공간무대>(1924)에서 보여준 공간연출 기법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바이블 성전>이라는 일종의 박물관건축을 디자인하면서 여기에도 그의 사상적 기저가 되는 ‘엔드리스’개념을 이용하여 관객이 직접 연기하는 극적 공간을 실현시킨 것이다.
이 같은 의미에서는 키슬러에게 <바이블 성전>은 ‘엔드리스’ 자체를 실현하기 위해 선택된 것이라는 분석도 가능하다.
<바이블 성전>은 단순히 『사해사본』을 보관하기 위한 뮤지엄이 아니라, 살아 있으면서 ‘재생’을 경험하기 위한 일종의 ‘극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대형 돔에서 관객이 겪는 체내회귀의 체험이 끝나면, 다시 좁고 긴 복도를 통과하게 된다.
돔에 전시된 『사해사본』에서 받은 각양각색의 상념을 긴 복도를 지나면서 가능한 한 정신을 집중시켜 내면적으로 심화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복도의 끝에는 바깥의 빛이 새어 들어오는 돌담이 있다.
여기에서 오르페우스는 저승에서 현실세계로 돌아온다.
키슬러는 관객을 성전 내부에서 외부로 복귀시키기 위해 또 다시 도선 몽타주 기법을 도입한다.
돌을 쌓아 만든 벽을 좌우에 둔 좁은 돌길이 그것이다.
이것은 입구의 정원이 했던 역할, 다시 말하면 위쪽을 개방시켜 내부와 외부를 상호 관련시키는 일종의 완충공간이다. 뿐만 아니라 좌측 벽에는 세 군데에 틈이 있어서 여기를 통과하면서 관객들은 멀리 예루살렘의 마을을 볼 수 있다.
키슬러는 이곳을 ‘명상의 돌길’로 생각했다. 이 좁고 긴 돌길을 지나면서 <바이블 성전>의 내부공간에서 경험한 사실들을 돌이켜 생각해보게 된다.
나아가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전개된 유태인의 역사, 그것을 포함하는 지구라는 천체(天體)의 유동적인 역사, 그리고 인간의 문화와 역사의 복잡한 양상 등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는 다시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는 키슬러가 이 성전을 위해 마련한 16개의 공간 유니트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각각의 유니트가 연속적으로 몽타주 되어 그 안을 지나는 관객의 정신세계 속에는 극적 체험이 가능하다.
그것은 극문학적 일화성(story)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어떤 움직임을 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것은 키슬러가 줄곧 생각하고 있었던 인간의 잠재적인 에너지와 환경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 다시 말하면 ‘디자인 상호관련’의 개념에 입각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인간과 환경, 그리고 역사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디자인 상호관련’을 실현하는 장(場). 이것이야말로 <바이블 성전>에서 키슬러가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키슬러는 이 건축을 위해 많은 생각을 했고 그에 따른 뚜렷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이 건축물을 ‘성전(Shrine)’이라고 부를 이유가 없지 않은가.
<바이블 성전>은 지금까지 설명한 공간적 구조를 통해서 진정한 의미에서 ‘성전’ 기능을 지니고 있는 건축물이다.
또한 이것은 최초의 컨셉이었던 ‘재생’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바이블 성전>이 완성된 것은 1965년 4월 20일이다.
3년 전 키슬러는 빈 시절 이후 예술적 동반자였던 부인 스테피를 잃었다.
키슬러도 이미 70대 중반이 되었다.
그러나 키슬러는 체력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환경조각’의 새로운 시리즈에 착수하고 있었다.
<바이블 성전>의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키슬러는 두 번째 부인 릴리안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했다.
키슬러의 유일한 독립건축물이기도 한 <바이블 성전>의 완성은 필립 존슨이 지어준 ‘건축을 짓지 않은 건축가’라는 별명을 반납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바이블 성전>을 배경으로 촬영한 키슬러 부부의 사진에서 키슬러는 너무도 슬픈 표정을 하고 있다.
이 글이 잡지에 연재 중이던 1977년 일본을 방문한 혈액학자이며 화가이기도 했던 알코플레이를 통해 우연히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키슬러의 친구이기도 한 알코플레이는 예술적인 면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키슬러의 상담상대였던 인물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바이블 성전> 개막식이 진행되는 동안 단 한 번도 키슬러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건물은 자선사업가 고테스만 부부의 재정적인 협력을 얻어 완성된 것으로 개막식 내내 그들의 이름으로 예루살렘시(市)에 기부되었다는 사실만 부각되었던 것이다.
알코플레이는 키슬러가 몹시 불쾌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 건물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미국에서의 반응은 물론 유럽의 신문 잡지 등에 <바이블 성전>을 소개하는 기사가 게재되기 시작했다.
키슬러의 이름이 점점 세계적인 찬사를 얻게 된 것이다.
1965년 드디어 미국의 건축가 연맹은 <바이블 성전>의 설계 및 기술적 성과를 평가하여 키슬러에게 골드 메달을 수상했다.
키슬러에게는 마지막이 되는 해에 미국은 근대건축의 아웃사이더인 그에게 수상을 결정한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인에서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가 1926년 뉴욕의 스탄웨이 홀에서 개최된 국제 극장박람회의 디렉터로 일하기 시작한지 40년이 지나서야 키슬러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해 말, 향년 75세의 키슬러는 돌아오지 못할 여행을 떠난다.
키슬러다운 극적 엔딩(ending)이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