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슬러는 기계기술문명 하에서의 건축을 파악하고자 했다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키슬러는 건축을 기계기술문명이 낳은 많은 제품들 중 하나로 보았다.
그 같은 관점에서 거꾸로 건축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건축 이외에도 너무도 많은 공업생산품의 현상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디자인 상호관련연구소(Laboratory for Design Correlation)는 그 같은 연구을 실질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곳이었다.
그는 여기서의 연구를 ‘디자인 상호관련’이라 명명하고, 그곳에서 다루어진 기술을 ‘바이오테크닉’이라 불렀다.
키슬러는 ‘건축을 위한 건축’에 관해 논하기를 거부하고 3가지 원칙에 따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말하는 3가지 원칙이란 사회성(the social)과 기술성(the tectonic), 그리고 구조성(the structural)을 말하는데, 이것은 주택이나 건축을 산업사회가 낳은 제품의 일종으로 볼 경우 다른 무엇보다 우선 고려되어야 하는 원칙이다.
이른바 제품디자인 영역에서 종종 거론되는 라이프 사이클 이론5)도 키슬러가 만든 차트 ‘기술에 있어서 요구의 진화’에 이미 등장한 바 있는 이론이다.
이 챠트는 사회적 관점에서 기술문명의 본질을 파악하는 입장을 취한 결과 산출된 것이다.


키슬러는 기계기술문명 하에서의 건축을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자 했다. 먼저 버크민스터 훌러가 건축을 쉘터의 일종으로 인식하고 에너지의 효율성이 높은 구조를 원칙으로 삼았던 데 반해, 키슬러는 기술적 경제적 효율이라는 점에 근거하여 각체구조를 선택함과 동시에 인간을 힘의 핵으로, 다시 말하면 에너지의 핵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인간에게 주택이라는 것은 인간의 에너지를 방출하는 장인 동시에 충전의 장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사실을 전제로 주택 또는 건축과 인간의 사이에서 에너지의 상호작용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같은 상호작용을 적극적으로 의식하는 사고방식을 그는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환경에도 확대 적용시킨다.
이에 따라 환경을 인간환경, 기술환경, 자연환경으로 나누어 생각하게 되는데, 키슬러는 이 세 가지 환경이 인간의 유전핵을 중심으로 상호관계를 지닌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키슬러는 이 같은 원리를 개인이나 가족단위에 한정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확장시킨 ‘사회적 유전’을 좀더 중요시했다.


모든 생체(生體)가 긴 세대에 걸친 연쇄를 거쳐 자기의 종(種)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이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사물은 오랜 이데올로기나 그와 비슷한 기능을 지닌 사물의 긴 계보로부터 발생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의자도 피곤한 몸을 쉬게 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그 밖의 도구가 긴 세월동안의 진화를 거쳐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이것이 교육을 통해 전승된 기술의 유전이라고 할 수 있다.2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디자인 상호관련은 단지 디자인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일종의 기술 문명론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키슬러 스스로가 명명한 바와 같이 ‘디자인의 과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키슬러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라는 기능주의의 공식을 부정하고 인간에게 내재된 힘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힘과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니는 기능의 발생을 발견해내고자 했던 것이 키슬러에 의한 기능의 재정의였다.
이 디자인 상호관련은 1939년에 발표된 것이다.
이것은 키슬러의 활동을 요약하는 이론이며, 이 안에는 키슬러가 주장했던 모든 건축상의 에세이의 근간이 되는 사상이 함축되어 있다.
나아가 그가 만든 개개의 구체적인 작품을 설명하는 단순한 에세이가 아니라 객관성을 지니고 논문의 성격을 띤다. 필자는 20세기 역사상 바우하우스 운동에 필적할 만한 사상은 키슬러의 디자인론밖에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건축디자인을 하나의 과학으로 인식했던 이 논문의 발표 이후 키슬러는 ‘인간의 상상력’에 관심을 두게 된다.
특히 초현실주의와의 접촉을 통해 ‘상징성의 재발견’에 관심을 갖게 된 키슬러는 인류의 문화적 유전핵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구성주의와 데 스틸 등의 예술운동을 통해 도시와 건축디자인을 다루어왔던 키슬러에게 이 논문은 기계기술문명 하의 예술에 관한 많은 논쟁과의 ‘이별가’라고도 할 수 있다.
이후 그는 건축은 과학적 논리뿐만 아니라 예술적 상상력을 내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왜 그 같은 전환이 발생했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