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개요Ⅱ - 키슬러에게 ‘극장’이란 무엇이었는가?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여기서 우리는 키슬러의 작업이 극장설계 및 무대디자인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극(drama)’을 인간의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해프닝, 다시 말하면 우연과 필연의 신비로운 연속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했다.
동시에 인간의 삶이란 결코 매일매일 정해진 루틴 워크(routine works)의 틀에 끼워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 환경, 문화적 습관, 시대적 변혁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인간의 창조적 활동은 모두 이 같은 사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극’이라고 생각했다.
하루하루 생활에서 발생하는 일들도 키슬러에게는 하나의 ‘극’이었다.
나아가서 우주적 규모에 이르기까지 상상력을 확대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른바 셰익스피어의 ‘테아트르 문디’와 같이 극장 안에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상은 20세기에도 유효하다고 믿었다.
따라서 키슬러에게 ‘건축’은 우선 ‘극장’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가 구상한 최초의 건축이 <엔드리스 극장>이었던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며, 그것이 이후 그가 설계한 건축의 기본방향을 결정했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의 유명 건축가 중에 극장안(案)이나 극장을 설계한 사람은 많다.
그러나 대부분의 건축가들은 다른 건축물과 더불어 극장도 설계한 것에 불과할 뿐 극장설계를 통해 피력된 컨셉을 그 밖의 건축에 적용했다고는 볼 수 없다.
키슬러만이 유일하게 모든 건축물에 극장공간의 개념을 적용시켰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만년에 이르러 본격적인 제작에 착수한 환경조각을 통해 바닥, 벽, 천장을 지니고 있는 기존의 건축을 또 다른 방법으로 부정한다.
여러 개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환경조각은 정신적인 쉘터, 다시 말하면 정신적인 안식처로서의 건축을 생각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명상의 동굴>(1962)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명상을 위해 디자인된 건축물이었다.
키슬러는 마치 동굴을 연상시키는 쉘터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정신적인 움직임에 주목하여, 인간의 영혼이 자기 자신의 내면세계를 무대로 연기하는 ‘보이지 않는 연극’을 구상했던 것이다.
<명상의 동굴>과 거의 같은 컨셉으로 설계된 것이 예루살렘에 있는 <바이블 성전 The Shrine of the Book>(1965)이다.
이것도 고고학적 유물인 『사해사본』를 전시하기 위한 공간이 마련된 건물이라는 기능적인 측면보다는, 연극적 공간구성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정신적인 ‘재생(re-birth)의 장’을 연출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극장기능을 충족시키기 위한 장치를 구비하지는 않았지만, 이 신전은 종교적 기능을 하는 일종의 극장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여기에도 역시 ‘보이지 않는 연극’, 다시 말하면 관객의 정신적인 ‘재생’을 테마로 방문객의 내면세계에서 상연되는 연극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키슬러의 작업은 건축이라는 특정 장르에 국한시켜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회화나 조각과 같은 미술장르의 하나로 규정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키슬러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든 관객의 눈앞에서 전개되는 일이든 극적 세계를 경험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없다고 생각했다.
건축내부를 통과하는 과정 자체가 연극적 체험의 일종이었다.
환경조각 <우리, 너, 나 Us, You, Me>(1964∼1965)를 구성하는 37개의 조각군 사이사이를 회유(回遊)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극장 안에서는 공간의 변모, 다시 말하면 조명과 장치의 다양한 조합에 의한 조형적 변화, 연기하는 인간의 형상을 통한 극의 전개, 그리고 음향과 음악, 관객의 반응, 막의 개폐에 의한 일상과 비일상의 교차 등의 요소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환경예술가의 입장에서 보면6) 극적 세계만큼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 경우는 없다.
따라서 키슬러가 구상했던 예술은 결과적으로는 환경예술로 발전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키슬러에게 극적 세계는 비현실과 현실을 교차하는 상상력이 작용하는 세계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1940년대 이후 ‘심볼과 이미지네이션’이 그의 작품경향을 결정하는 열쇠가 되었다.
그의 활동은 기술적 이미지네이션에서 정신적인 이미지네이션으로, 그리고 극적 세계의 연출로 변모를 거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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