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개요Ⅲ - 키슬러에게 ‘엔드리스’란 무엇이었는가?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키슬러의 작품에 등장하는 각체구조는 달걀이나 조개껍질 등에서 볼 수 있는 곡면의 연속적인 구조와 같은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예를 들어 초기작품인 <엔드리스 극장>안(1924)을 통해 키슬러는 평편한 타원형의 달걀형 건축을 제안했는데, 이 내부는 ‘연속적 구조체(Continuous Construction)’의 원리에 입각한 나선형 구조를 띠고 있다.
같은 기법이 <나선형 대형상점 A Big Market in the Form of Spiral>(1925)에서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여기서는 중앙에 위치한 원통 축을 중심으로 건축물 전체가 매달려 있는 외팔보(cantilever)기술을 사용하여 건물바닥이 마치 볼트처럼 연속되는 플랜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경향은 바닥, 벽, 천장이 연속적인 곡면구조로 된 <엔드리스 하우스>(1959)에서 다시 한 번 선보인다.
그런데 이 <엔드리스 하우스>에서 표명된 컨셉과 동일선 상에 위치시킬 수 있는 것으로 몇 개의 화랑설계를 들 수 있다.
1947년 초현실주의 국제전의 <미신의 방>과 같은 해 열린 ‘피의 불꽃(Blood Flames)’전의 전시디자인이 그것이다.
여기서 키슬러는 기존의 평범한 사각형 실내공간을 전제조건으로 하면서도 바닥, 벽, 천장이라는 기호화된 실내공간에 뫼비우스 띠와 같은 연속적 구조를 이용해 엔드리스 개념에 입각한 공간연출에 성공하고 있다.
<미신의 방>의 경우 두 개의 연속적인 리본상태의 원을 조합하였고, 피의 불꽃전에서는 오늘날의 슈퍼그래픽 기법과 흡사한 방법으로 엔드리스 개념을 실천하고 있다.


실내공간연출에 엔드리스 개념을 적용시킨 이 두 가지 예는 전시디자인 측면에서도 획기적인 것이었다.
키슬러는 회화나 조각 등의 작품들이 상호연속관계를 지닐 수 있도록 계획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키슬러의 엔드리스 개념이 공간의 연속성에 그치지 않고 그곳에 놓이는 물체들 사이의 연속성에 이르기까지 확대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물체 상호간의 연속성을 키슬러는 ‘갤럭시(Galaxy)’라는 단어를 빌어 설명했다.
<갤럭시 초상>에서는 한 장의 종이에 신체의 각 유니트가 사이를 두고 그려져 있고, <갤럭시 조각>에서는 단일 작품을 구성하는 유니트와 유니트가 서로 떨어져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갤럭시’는 일정 공간 상에 놓인 몇몇 유니트들의 관계를 지칭하는데, 하나의 유니트로부터 다른 유니트로 그리고 또 다른 유니트로 연속되게 배치함으로써 각 유니트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통해 공간이 눈에 보이는 형태를 갖추게 된다.
1957년에 설계한 월드 하우스 화랑(World House Gallery)의 내부공간구성에서도 <엔드리스 하우스>에서와 같이 곡면이 연속되는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또한 그곳에 전시되는 회화나 조각작품의 배치도 유니트들 사이의 연속성을 고려해 디자인했다.
이 모든 것이 엔드리스 개념에 입각해 디자인된 것이다.


그런데 이 <월드 하우스> 화랑에서 실천된 엔드리스 개념은 연속된 곡면을 지닌 실내공간의 연출 및 연속성을 고려한 작품배치에만 적용된 것이 아니다.
키슬러는 화랑을 방문하는 관객과 공간과의 관계 또는 관객과 작품과의 관계에도 엔드리스 개념을 적용했다.
여기서 우리는 키슬러가 주장한 엔드리스가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주목한 결과물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관객과 공간 또는 관객과 작품과의 상관관계가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된 것이 바로 극장이다.
키슬러는 애초부터 극장설계를 출발점으로 하고 있으므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극장이라는 대상을 다루는 데 있어서 키슬러는 어떤 건축가보다도, 어떤 무대디자이너보다도 관객의 입장에 서서 디자인했다.
이 같은 태도는 유진 오닐작 <황제 존스 Emperor Jones>(1924)와 사르트르 작 <출구 없음 No Exit>(1946)의 무대디자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키슬러는 무대 안쪽에서 전면을 향해 경사를 이루고 있는 나팔관형 무대공간을 구성하여 어떤 관객석에서도 무대에서 전개되는 상황을 자세히 볼 수 있게 배려했다.
무대디자인뿐만 아니라 건축도, 극장도, 화랑도, 주택도, 디자인하는 측의 논리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수용하는 측의 입장에 서서 디자인했다.
이같이 일반적인 경우와는 전혀 다른 접근방법의 결과 탄생한 것이 ‘엔드리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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