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엿보기 상자’의 세계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키슬러와 뒤샹의 관계는 그 후에도 계속된다.
특히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를 피해 유럽을 탈출한 뒤샹은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처음에는 막스 에른스트의 아파트에서 머물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7번가 56번지에 있는 키슬러의 아파트로 거처를 옮긴다.
1942년은 키슬러가 설계한 ‘금세기 예술’화랑이 착공된 해이며, 완성된 해이기도 하다.


‘금세기 예술’화랑의 전시공간은 키슬러의 독자적인 아이디어에 의한 것으로, 그 중에는 키슬러가 발명한 전시장치가 여러 개 포함되어 있다.
클레와 뒤샹을 위해 키슬러가 발명한 감상용 장치도 그 중 하나이다.
이것들은 ‘키네틱 화랑(Kinetic Gallery)’이라고 불린 곳에 설비되었다.


뒤샹을 위한 장치는 <트렁크 속의 상자 Bo봳e-en-valise>(1941)를 위해 고안되었다.
뒤샹의 전(全)작품의 작은 미니어쳐 레프리카로 만들고, 그것들을 가방 안에 넣어둔 이 작품은 일종의 ‘포터블 미술관’과 같은 것이었다.
키슬러가 왜 이 작품에 흥미를 지니게 되었는가?
키슬러는 대중이 보다 쉽게 예술작품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예술작품과 대중의 관계는 편안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뒤샹이 이 작품에서 보여준 아이디어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뒤샹을 위한 키슬러의 장치에는 커다란 소용돌이와도 같은 형태의 목재가 달려 있다.
관객들은 손으로 이것을 돌려가면서 작은 구멍을 통해 <트렁크 속의 상자>에 들어 있는 14개의 레프리카를 차례로 보게 된
다. 다음 페이지의 그림은 페기 구겐하임이 이 장치를 돌려가면서 사용하고 있는 장면이다.


뒤샹의 ‘엿보기 장치’로는 그의 유작 <주어진 상자:(1) 낙수(落水) (2) 조명용 가스가 주어진다고 해도 Etant donn럖:1. La chute d’eau, 2. le gaz d’럄lairage>(1946∼1966)가 유명하다.
필자는 이미 『미술수첩』에 「키슬러 추척(キ-スラ-追跡)」을 연재하던 중에 키슬러가 그린 미술관을 위한 컨셉추얼 드로잉을 발견하고 그 중요성을 지적한 바 있다.14
작년(1977) 6월 파리의 퐁피두센터에서 개최된 <파리·뉴욕 앨범 Paris New York Un Album>전을 계기로 이 ‘금세기 예술’화랑의 전시디자인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또한 신시아 굿맨은 미국의 잡지 『아츠 Arts』 977년 6월호에 키슬러에 관한 논문을 기고했는데,7) 여기서도 역시 키슬러의 ‘엿보기 장치’와 뒤샹의 유작을 관련시켜 논했다.


키슬러가 운동의 시각적 효과와 확장에 몰입하고 있던 1920년대에 뒤샹도 같은 방법으로 옵티컬 경향의 작품을 위한 실험을 하고 있었다.
결국 이 두 사람은 ‘금세기 예술’ 화랑의 키네틱 갤러리에서 만나게 되는데, 이 만남이 뒤샹이 유작 <주어진 상자:(1) 낙수(落水) (2) 조명용 가스가 주어진다고 해도>를 제작하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