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의 희생 2

<창세기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아브라함은 볏집을 묶고 장작을 패서 제사 지낼 준비를 마쳤다.
아브라함은 잠든 모자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몇 차례 눈물을 닦았으며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동이 막 트려고 할 때 조용히 이삭을 깨웠다.
이삭의 귀에 대고 어머니가 깨지 않게 조용히 일어나라고 소근거린 후 종 두 사람더러 제사를 지내기 위해 떠날 차비를 해 두라고 분부하였다.
아침 일찍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나귀에 태우고 종들 등에는 제물을 태울 볏집과 장작더미 지워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을 향해 떠났다.


이 광경을 사라가 보았을까?
창세기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길을 떠나면서 이 사실을 사라와 합의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사라가 어떻게 이 일에 대처했는지 알 수 없다.
만일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라가 남편과 함께 들었거나 남편으로부터 전해 들었다면 사라는 분명 이삭대신 차라리 자기의 몸을 제물로 바치라고 떼를 썼을 것이다.
90세에 얻은 자식이고 더는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마당에 순순히 자식을 아비 편에 제물로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죽음도 모르고 즐거운 표정으로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는 이삭의 뒷모습을 사라가 보았다면 그녀는 아마 땅을 치며 통곡했거나 넋을 잃고 쓰러졌을 것이다.


길을 떠난 지 사흘 만에 아브라함 일행은 모리아 산이 멀리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전승에 의하면 모리아 지역의 산은 훗날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립한 예루살렘의 언덕이라고 한다.
이 사흘은 아브라함의 평생에 있어서 가장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는 또한 가슴을 에어내는 듯한 하나님의 시험을 통해서 신앙의 조상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구비하는 시간이었다.
고향을 떠난 이래 아브라함은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많은 재산을 모으며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자식의 축복도 받아 이스마엘과 이삭 두 아들을 얻었으며 부리는 종도 많았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두 주인으로 섬길 수 없는 것이다.


구약성경 저자는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향해 “네가 나보다 네 아들 이삭을 더 사랑하느냐? 나를 위해서 이삭을 포기할 수 있겠느냐?” 하고 시험하신 것이다.
인간의 눈에는 이 같은 하나님의 시험이 잔인하게 보인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서 창세기 편집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고 명료하게 적었다.
교훈을 주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쳐야 한다는 점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서 지적한 것이다.
신앙은 이 같은 시련을 극복할 때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신앙을 고백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죽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요한복음 3:16).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했으므로 자기의 외아들을 보내 십자가의 제물이 되게 하셨다.
이를 보면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시험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나님도 외아들을 인류를 위해 제물로 삼으셨던 것이다.


종교는 희생을 요구한다. 정의의 신은 자기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하도록 하며 자기 생명을 대신해서 자기의 가장 귀중한 것을 바치라고 한다.
동양에서도 희생이란 산제사 즉 산 짐승을 바치는 것이다.
실제로 짐승을 잡아 천신께 희생 제물로 드리는 관습이 있었음을 옛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禮記編 月令 春秋 좌씨전 장공 십 년 참조).


현재 예루살렘 성전 안 중심에는 사각형 울을 쳐 놓은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했던 모리아 산의 제단이다.
일부 신학자들은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사흘 길을 걸어갔다고 했으니 예루살렘 북쪽 세겜에 있는 그리심산이 모리아 산이라고 주장한다.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말했다. (22:5)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사를 볏집과 장작을 이삭의 등에 지우고 자신은 불씨와 칼을 숨겨 들었다.
아브라함과 함께 산을 올라가던 이삭이 말했다. (22:7-8)


“내 아버지여”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과 이삭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 이르렀다.
그는 그곳에 제단을 쌓고 볏집을 평평하게 한 후 그 위에 장작을 펼쳐 놓았다.
그리고 가엽게도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아들 이삭을 밧줄로 단단히 묶어 장작더미에 위에 올려놓았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울음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은 채 하나님께 애절하게 기도했다.
하나님! 다른 방법은 없단 말입니까?
이대로 집행하란 말입니까?
아브라함이 칼을 높이 쳐들어 막 이삭을 내리치려 할 때 하나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22:11-12)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 소리를 들은 아브라함이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뿔이 덤불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숫양 한 마리가 보였다.
아브라함은 기쁜 마음으로 숫양을 잡아 이삭 대신 번제물로 하나님에게 바쳤다.
하나님이 친히 번제물을 마련해 주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곳을 여호아이레(YHVH-yireh)라고 명명했는데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다 The Lord Provides”는 뜻이다.


하나님의 천사가 또다시 큰 소리로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22:16-18)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아브라함은 종들이 있는 곳으로 와서 그들을 데리고 걸음을 재촉하여 브엘세바로 돌아갔다.
그는 처음으로 새 인생을 시작하는 감격을 맛보았으며 자기에게 일어난 기쁜 소식을 속히 사라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에게는 돌아가는 사흘길이 멀기만 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사라와 소실 하갈 사이의 가정불화로 적자 이삭을 남겨 두고 서자 이스마엘을 어미 하갈과 함께 내쫓아야 했다.
아브라함은 하갈 모자를 내보내며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사라가 조강지처이긴 하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하갈은 소실이기는 해도 이집트서부터 따라와서 자식을 낳아 주고 자신에게 평생을 바친 여인이다.
그리고 이삭을 갖기 전까지는 이스마엘을 적자로 여기며 키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분부한 것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비정하게 내쫓은 것에 대한 질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위로하고 축복하신 것을 보아도 이 사건은 그분의 뜻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갈과 이스마엘의 축출 그리고 이삭을 제물로 바친 사건은 아브라함의 생애에 가장 중대한 사건으로, 하나님이 주신 시련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태어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시련들을 극복한 후에야 아브라함은 인간으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