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단 풍상 70년 - 월전 회고록
장우성 지음 / 미술문화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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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성은 저서 『화단 풍상 70년』에서



장우성은 저서 『화단 풍상 70년』(미술문화)에 그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6·25동란이 발발하기 두 달 전 하루는 이른 식전에 그가 장우성의 집을 찾았다.
밀집 모자를 푹 눌러쓰고 조그만 손가방을 든 채 면도도 하지 않은 초췌한 모습이었다.
방에 들어서서는 대뜸 세수할 물을 달라고 청했다.
오랜만이어서 장우성이 행적을 물으니 어름어름 대답을 피하면서 가방을 열고 화첩을 꺼낸 후 거기에 그림을 한 폭 그려달라고 청했다.
이른 시간이라서 아침상을 차려내고 화첩을 두고 가면 곧 그림을 그려놓을 테니 나중에 가지고 가라고 했더니 시간이 없다며 당장 그려달라고 졸랐다.
즉석에서 그려주니 황급히 일어서서는 휭하니 사라졌다.
그 후 소식이 끊겼고 6·25동란이 발발하여 불안과 초조의 나날을 보내던 중 장우성이 들은 소식은 인민군이 덕수궁미술관에 있는 미술품들을 북으로 가져가기 위해 나무상자에 짐을 구리는 현장에 이석호가 참여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청계 정종여(1914~84)는 경상남도 거창 태생으로 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1934년경 서울로 와서 향토적 수묵화가로 명성이 높은 이상범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935년 제14회 협전에 처음 입선했다.
협전은 1935년 10월 23일부터 30일까지 휘문고보 강당에서 열렸다.
동양화부 입선자는 정종여 외에 김진우, 조동욱, 오일영, 김기창, 장우성, 심인섭, 이석호, 진세빈, 이용우, 장운봉, 조용승, 박승무, 고희동, 최우석, 김중현, 노수현, 백윤문, 이상범, 지성채, 정운면 등이었다.
서양화부 입선자는 도상봉, 박광진, 이제창, 김중현, 공진형, 장석표, 이승만, 장발, 윤희순, 김용준, 이동우 등이었다.
김중현은 동·서양화부 모두 입선했다.


정종여는 1936년부터 선전에 출품하면서 입선과 특선으로 화단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40년을 전후하여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미술학교와 사설 미술연구소에서 일본화를 배웠으며 일본화 경향의 화조화와 인물화를 세밀한 채색화로 그리면서 이석호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선전에 출품했다.
해방 후 그는 좌익 성향의 조선조형예술동맹 간부위원, 조선미술동맹 간부가 되었으며, 1948년 정부 수립 전후 여운형이 암살된 후 박헌영이 이끈 좌익계 민족주의 민족전선 산하단체인 조선미술동맹이 와해되자 전향을 나타냈고, 1949년 4월에는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9·28 서울 수복 때 월북한 그는 평양미술대학 조선화 강좌장, 조선미술가동맹 부위원장을 지내고 ‘인민예술가’의 명예칭호를 받았다.
현존하는 월북 이전의 작품으로 <지리산 풍경>(금성 북한 36)(1930년대, <금강산 전망> 등이 있다.


<지리산 풍경>은 소품이지만 그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큼 훌륭하다.
그는 작품에 청계라는 호를 사용했는데 20대 초 한때 기산이란 호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
청계란 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1936년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경에 산촌의 초가와 기와집이 보이고 토담 옆의 감나무는 속도감 있는 단붓질로 사생하듯 묘사했고,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와 감나무에 달린 감은 석채로 처리하여 수묵 효과와는 달리 마티에르와 색채를 강조하여 생동감을 높였다.
수묵과 청색을 적절히 조화시켜 산세와 원근감을 잘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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